벼
鄭 木 日
가을 들판에 가보면 고개 숙여 기도하고 싶다. 땅에 꿇어앉아 벼에 입 맞추며 경배하지 않을 수 없다. 아, 누가 이 들판에 황금빛깔을 가득 채워 놓았는가. 벼이삭들을 튼실하게 알알이 여물게 하였는가. 농부들의 땀에 저린 큰 손길이 느껴지고 햇볕에 검게 탄 얼굴이 떠오른다. 들판에선 씨앗을 뿌리고 뙤약볕을 마다하지 않고 김을 맨 농부들의 초록빛 거룩한 손길이 느껴진다.
가장 부드럽고 유순해 보이는 벼들이 태풍과 가뭄을 견뎌내고 들판을 온통 황금빛깔로 채워놓았다. 익어가는 벼의 빛깔과 향기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번쩍거리는 금빛과는 사뭇 다르다. 마음을 맞아들여 미소 짓게 하는 빛깔이다. 온화, 유순의 얼굴이다. 하늘과 기후가 내는 성숙, 완성, 깨달음의 오묘한 미소이다. 숨 막히는 무더위를 견뎌내고, 대지를 휘감는 폭풍의 시련을 겪고 난 후 짓는 표정이다. 감미로움을 전해주는 꽃향기와는 다르다. 위로, 충만, 환희를 안겨주는 뿌듯한 향기다. 벼는 일생의 전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음으로 얻은 빛깔과 향기로 가을 들판을 채워놓는다. 겸손과 인내에서 온 감동의 빛깔이며, 어쩌면 눈물의 향기인지도 모른다.
겨울 들판은 비어 있다. 벼들이 사라진 들판은 긴 휴식과 침묵 속에 빠진다. 논밭은 얼어붙고 찬바람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벌거숭이 나무들은 비명을 내지른다. 겨울 들판은 비어 있지만 숨 쉬지 않는 건 아니다. 힘을 비축하고 있다. 얼었던 대지를 열어 제치고 생명을 발아시키기 위해 휴식기를 갖고 있을 뿐이다.
봄이 오면 농부들은 서둘러 논을 갈고 모판을 마련한다. 대지의 속살을 파 뒤엎는다. 흙덩이들은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 농부는 볍씨를 물에 불려 말리고 못자리에 씨를 뿌려 모를 만든다. 농부는 하늘로부터 모를 심고 수확하는 거룩한 임무를 위임받은 사람이다. 하늘과 땅에 초록빛 기도를 바친다.
논에 물을 넣고 날을 받아 모심기를 한다. 한 줄씩 맞춰가며 들판을 초록으로 가득 채워놓는다. 모심기를 끝낸 논을 바라보는 순간, 농부는 자신도 모르게 한 포기 모가 됨을 느끼리라. 이 모들은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변하고 그 빛깔을 거두는 기쁨을 가지게 되리라.
들판에 나가면 하늘의 말과 벼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벼와 숨을 맞추지 않은 사람은 진실한 농부라 할 수 없다. 벼들은 농부들의 발걸음 소릴 듣고 자란다. 농부들은 벼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든다.
벼야말로 인류를 먹여 살리는 더 없이 고마운 곡물-. 전 세계 인구 절반이 주식량으로 삼는 농작물이 아닌가.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식량이 되고 목숨 줄을 잇게 해준다. 생명을 주고 기른 어머니이자, 고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늘이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이 풀을 주신 게 아닐까.
여름의 들판은 벼들이 커 가는 숨소리로 가득 찬다. 농부들은 논에 들어가 피를 뽑아낸다. 태풍에 넘어진 벼포기들을 일으켜 세우고 비가 온 뒤엔 물이 잘 빠지게 배수로를 만들어 준다. 태풍이 지나갈 때마다 벼들은 무더기로 쓰러진다. 벼들은 다시 일어난다. 어울려서 힘을 내어 일어선다. 목이 타들어가고 물에 잠겨도 묵묵히 견뎌낸다. 멸구에 시달리면서 밤을 지새운다. 7, 8월에 꽃술만 삐쭘 드러내는 연한 노란색의 벼꽃은 햇빛에 반짝이는 귀여운 귀걸이 같다고나 할까.
농부는 가을 들판에서 익어가는 벼들을 보면서 흙, 물, 태양의 온기를 느끼고 벼의 은혜를 생각한다. 인류의 젖이 되고 밥이 되는 벼! 떡이 되고 술이 되는 벼! 흥과 신바람이 되는 벼! 노래와 춤이 되는 벼! 풍요와 평화가 되는 벼!
가을 들판의 벼들 앞에선 누구나 머리 숙여 경배해야 하리라. 농부에게도 고개 숙이고 감사해야 한다. 벼들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는다. 말없이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풍요와 안식을 안겨준다. 때가 되면 벼들은 들판을 비우고 사라진다.
벼는 생명 그 자체이며 생명을 키우는 위대한 모성을 지녔다. 아무리 찬미한다고 한들 어찌 그 은혜에 미칠 수 있으랴. 평생 동안 밥을 먹고 지내오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온 것인가. 벼의 삶과 일생을 생각하면, 너무나 부족하고 미숙함을 느낀다.
아, 들판을 물들이는 벼의 황금빛으로 인생의 가을을 맞이할 순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