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무늬 정태헌

 

그날내소사來蘇寺로 들어서는 길목은 인적이 뜸했다일주문을 건너 천왕문에 이르기까지 사백여 미터의 전나무 숲길침엽수 맑은 향내가 코끝에서 떠나질 않았다아름드리 전나무가 수백 그루 들어선 조붓한 그 숲길에서 그 사람과 마주쳤다사십 중반의 승복 차림인 그는 전나무 숲을 올려다보며 맞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간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이 그의 얼굴을 스치곤 하였다그런 얼굴을 본 적이 있을까 싶다몸매는 여위었지만 얼굴은 청량했으며 눈매가 순하고 입가에 흐르는 미소가 그윽했다.

정갈하고 투명했다살아온 길이 그랬을까아니면 닦아놓은 결과였을까그동안 생의 여정은 어떠했으며 마음자리는 어떤 상태인지 궁금하기만 했다잘 생긴 것도 아닌 평범한 얼굴인데도 결곡한 인상이었다몇 발짝 걷다가 뒤돌아보았다걸음걸이 또한 흐트러짐이 없이 빗질 된 뒤태였다뒷모습에는 그 사람의 지난날이 배어 있고 앞 얼굴에는 현재가 서려 있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한참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앞서가던 일행의 채근이 있고서야 발걸음을 떼었다그 후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맞댈 경우 그 사람의 얼굴이 불현듯이 떠오르곤 했다.

눈길이나 마음을 붙잡은 사람이나 풍경은 깊이 서려 있다가 다시 솜솜하게 되살아나 빛이 되는 모양이다얼굴을 영혼의 통로라고 했던가. ''은 영혼이고 ''은 통로다얼굴은 마음을 투영하며 영혼의 상태를 정직하게 나타낸다표정은 가릴 수 있을지라도 인상은 온전히 감출 수가 없다감추려고 해도 오래가지 못하고 드러나게 마련이다젊은 얼굴이라도 혼탁할 수가 있고 나이 든 얼굴이라도 개결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돋보이는 얼굴이라도 그늘이 있는 경우가 있고 못생겼을지라도 평안한 얼굴이 있다죽은 자의 얼굴과 산 사람의 얼굴은 판이하다죽은 자의 얼굴은 표정이 없고 굳어 있지만 산 자의 얼굴은 감정이 드러나고 근육에 의해 표정이 수시로 바뀌게 된다영혼의 상태와 유무에 따라 속내가 얼굴에 반영되는 것이리라.

사람의 얼굴은 팔십여 개의 근육으로 되어 있는데 칠천여 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가 있다고 한다신체 가운데 근육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으며 가장 오묘한 것이 바로 얼굴이라는 것이다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게 얼굴이며 이는 삶의 길목에서 우리가 스스로 빚어 가는 생의 무늬일 터이다그러기에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다른 동물들은 대부분 얼굴을 숙이고 땅바닥을 보지만신은 인간의 이마를 세워 얼굴을 들게 하고 등뼈를 일으켜 머리를 하늘로 향하게 해 주었다얼굴을 소중히 여기라는 신의 뜻이 아니랴나이 사십이 지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우리는 얼굴 그 자체를 선택할 자유는 없지만 바꿀 수는 있다하나 표정은 바꿀 수 있을지라도 인상은 쉽게 바꿀 수가 없다화장으로 얼굴을 꾸미거나 손질을 해서 고쳤더라도 인상은 온전히 감출 수가 없으며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다마음자리를 맑히기보다 겉만 다듬는 데 공을 들인 얼굴은 사람들의 눈길을 오랫동안 끌지 못한다겉에서 꾸민 얼굴과 속에서 우러난 얼굴은 금방 구별이 되기 때문이다품위 있고 그윽하며 깊은 얼굴을 지닌다는 것은 그래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자신의 얼굴을 분별할 수 없을 때가 많다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가 있지만 스스로 얼굴은 주관적으로밖에 인식되지를 않는다인간의 얼굴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인상이 변한다마음 밭이 맑으면 얼굴도 밝고마음 밭이 흐리면 얼굴도 탁해질 수밖에 없다여러 방법으로 표정을 감추는 데 능란한 사람을 만날 수가 있다그런 얼굴을 지닌 사람은 선뜻 호감과 신뢰가 가질 않는다.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 되기도 하고 한 권의 책이 될 수도 있다그만큼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내 인상은 어떻게 보일까 하고 사람들은 궁금해 하며 거울 앞에 서보기도 한다나 또한 그런 적이 있으며 인상이 어떻다는 남의 말에 귀 기울인 적도 있다마음의 상태와 무관하게 좋은 인상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 게다.

하지만 이는 욕심일 뿐거울 저편에 담긴 얼굴을 대하면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탐욕과 아집교만과 이기로 얼굴에 영혼의 때가 끼어 있기 때문이다사진을 찍자고 하면 이젠 완곡하게 거절하며 도망가기 일쑤다찍혀 나온 얼굴이 어색하여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어찌 표정이 저리 새무룩하고 밝지 못할까 하고 스스로 혀를 차기조차 한다갈수록 거울을 보기가 짓쩍고 민망하다투명하고 수련한 얼굴이기를 싫어할까마는 마음자리가 따라가질 못하니 그저 주제넘은 바람일 뿐이다.

사람의 얼굴은 열 번 변한다고 한다이는 영혼의 상태에 따라 마음자리가 변한다는 뜻이리라밝은 얼굴이 흐려질 수도 있고 탁한 얼굴이 맑아질 수도 있다건강한 육신만으로 빛나는 얼굴을 지닐 수는 있겠지만 품위 있고 고결한 얼굴에까지는 미치지 못할 터이다.

얼굴은 그 사람의 속뜰에서 우러나며 그 속뜰은 그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처소이다얼굴을 가꾸는 방법은 마음을 닦고 영혼을 맑히는 일이리라정갈한 마음과 영혼에서 우러나온 얼굴은 깊고 투명하며 그윽해서 누구에게나 맑음과 충만한 기쁨을 줄 수가 있다전나무 숲길에서 마주친 그 얼굴을 떠올리면 어느새 마음이 흔흔하게 맑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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