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기(新綠期) / 정목일  

 

 

 

우리나라 사월 중순부터 오월 중순까지 한 달쯤의 신록기(新綠期)엔 그 어떤 꽃들도 빛날 순 없다.

색채나 빛깔에 신비장엄경이라는 왕관을 씌운다면 꽃이 아닌 신록에만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장미모란국화튤립 등은 화려우아매혹황홀이란 공주가 쓰는 관쯤이면 될 것이다신록은 신이 낸 빛깔이어서 스스로 햇빛을 끌어당기고 향유를 바른다신록은 탄생의 빛깔이다볼 때마다 빛깔들이 꿈틀거리고 새로워진다.

 

산이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선 어디로 가나 숲을 볼 수 있다산엔 소나무가 가장 많지만수많은 나무들이 어울려 산다외국처럼 특정한 나무들로만 숲을 이루고 있지 않아서 봄가을엔 색채의 향연 속에 빠지게 만든다수목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신록과 단풍의 색채가 다양하고 아름답기가 세계에서도 으뜸이 아닐까 한다.

 

신록기의 산과 숲에선 수백의 초록이 한데 넘실거린다엇비슷하면서도 다른 미묘하고 섬세한 초록 빛깔들은 도대체 몇 가지나 될까나무들의 수효보다 많을 듯하다한 나무일 지라도 오래 된 잎과 새 잎의 빛깔이 다르다넓직한 잎좁직한 잎바늘잎의 빛깔이 서로 차이가 난다.

한 잎이라 할지라도 앞뒤의 빛깔이 사뭇 다르다바람에 흔들리며 잎의 빛깔들이 반짝거린다새들도 오래 동안 말문을 닫고 지내다 신록 속에서 새로운 말들을 주고받는다신록기의 산과 들은 색채로 넘쳐나는 신명그 자체다.

 

청단풍은 푸르무레전나무 구상나무는 푸르스레산수유 생강나무는 푸르초롬느티나무는 푸릇푸릇참나무는 푸르딩딩소나무는 검푸레하다나무들은 금방 산부(産婦)의 몸에서 생겨난 빛깔들을 띄고 있다순산(順産)의 빛깔이라 할까갓난아기처럼 젖 내음을 풍기고 피부는 햇살에 비춰 보일 듯 맑고 여리다보드랍고 천진스러워 볼을 대고 입 맞추고 싶다.

 

초록 빛깔 속에도 강약(强弱)이 있고농담(濃淡)이 있다명암(明暗)이 있고 원근(遠近)이 있다나무들마다 빛깔들로 군락을 이뤄 둥글게 혹은 편편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그 군락들이 뒤섞여서 녹색의 구름밭이 되고 파도가 된다.

 

신록기의 나무들을 보면 하나씩의 초록빛 분수가 되어 뿜어 오른다오래 동안 참았던 그리움을 맘껏 펼쳐내고 있다빛깔들은 하늘과 사방으로 평창하고 있다초록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다신록기의 시시각각으로 살아 움직이는 초록 빛깔을 화가는 어떻게 화폭에 담아낼 수 있을까변하지 않는 바위산은 잘 그려낼 수 있지만볼 때마다 새로워지는 신록기의 산과 들판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나무들도 있는 힘을 다하여 신록을 펼치지만햇빛과 바람과 기후천지 기운이 함께 힘을 합쳐 내는 생명의 광채를 인간의 능력으로 어떻게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수백수천의 미묘한 초록 빛깔들을 어떻게 채색한단 말인가.

 

신록기엔 누가 천지 가득한 초록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것일까이 세상에 보지 못했던 선()과 색채들의 영혼을 깨워서 축복과 찬미의 신비음(紳秘音)을 내는 것일까나무들은 자신들의 군락마다 다른 악기들을 들고 있다.

단색(單色)이 아닌 기기묘묘하고 무한 음역의 초록 악기들이 지휘자의 손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신이 내는 오묘하고 깊은 선율이다황홀하고 청신한 신록의 대 오케스트라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신록기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신록을 통해서 세상은 다시 태어나고 새로워진다잎눈에서 초록의 빛깔들이 깨어나는 것이 깨달음이 아닐까.

 

인생의 신록기는 16~25 세쯤이 아닐까 한다이 시기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꿈꾸는 때이다내 신록기는 아버지를 여의고 소년 가장이 되어 시련과 방황 속에 지나갔다그러나 가슴 속에 신록의 꿈만은 잃지 않았다.

신록기엔 내 몸에서도 잎눈이 피어나서 순결한 기운이 흐르는 듯 눈이 맑아지고 마음이 푸르러진다잎눈에서 막 벌레처럼 기어 나온 듯 움직이는 빛깔탄생의 거룩한 광채환희로 넘치는 생기발랄의 초록을 본다.

 

신록이야말로 축복의 표정이요 찬미의 노래다꿈과 성장을 예비하는 은총의 기도이다우리에겐 이 신록기가 있어 마음을 순치시켜 주고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사계(四季)가 있고 산이 많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이 내리는 특별한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신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살아있음이 너무 행복하다신록기엔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하늘을 향해 마음껏 가슴을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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