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동화

 

 

박문하(19171975)

 

 

  가을비가 스산히 내리는 어느 날 밤이었다. 이미 밤도 깊었는데, 나는 비속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어느 골목길 한 모퉁이 조그마한 빈 집터 앞에서 화석처럼 혼자 서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오막살이 초가 한 채가 있었던 곳이다. 와 보지 못한 그 새, 초가는 헐리어져 없어지고, 그 빈 집터 위에는 이제 새로 집을 세우려고, 콘크리트의 기초 공사가 되어져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 앞에 묵연히 선 듯, 내 마음과 발걸음은 차마 이 빈 집터 앞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웅장미를 자랑하는 로마 시대의 유적도 아니오, 겨레의 피가 통하는 백제나 고구려나 서라벌의 유적도 아닌, 보잘 것 없는 한 간 초옥이 헐리운 빈 터전이 이렇게도 내 마음을 아프게 울리어 주는 것은, 비단 비 내리는 가을밤의 감상만은 아닌 것이다. 지난 몇 해 동안에 나는 몹시 마음이 외로울 때나, 술을 마신 밤이면, 혼자서 곧잘 이곳을 찾아왔었던 것이다. 밖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는, 통금 시간이 임박해서도 이 초가 앞을 한 번 스쳐가지 않으면, 잠이 잘 오지 않는 때가 많았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직 이 초가집 주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 가족들이 어떤 사람들 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내가 이 초가집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의 일로서, 그 때 나는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고 생각된다. 내 형제들은 32녀가 되지만, 모두가 그 때 중국 땅에 망명을 가서, 생사를 모르던 때이다. 홀어머니는 막내아들인 나 혼자만을 데리고, 남의 집 삯바느질로 겨우 연명을 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님이 갑자기 병이 들어서, 두 달 동안을 병석에 앓아눕게 되었다. 추운 겨울철이었기 때문에, 우리 모자는 그야말로 기한에 주리고 떨게 되었었다. 이웃 사람들이 이 딱한 꼴을 보다 못해서, 나를 호떡 파는 곳에다가 취직을 시켜 주었었다. 낮에는 주린 배를 움켜 고서 그래도 학교엘 나가고, 밤에는 호떡 상자를 메고 다니면서 밤늦게까지 호떡을 팔면, 겨우 그날의 밥벌이는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나는 호떡 상자를 어깨 위에 메고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맛좋은 호떡 사이소, 호떡.”하고 외치면서,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길 가에 있던 조그만 초가집 들창문이 덜커덩 열리더니, 거무스레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었다.

   “호떡 5전어치만 주라.”

중년 남자는 돈을 쥔 손을 쑥 내밀었다. 어스름 램프불이 졸고 있는 좁은 방안에는 나보다 나이 어린 두 오누이가 있었고, 그 옆에는 어머니인 듯한 중년 부인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호떡 1개 값은 1전이고, 5전어치를 한꺼번에 사면 덤으로 한 개를 더 끼워서 주던 때였다. 중년 남자는 떡 여섯 개를 받아서는, 오누이에게 각각 두 개씩을 나누어 주고는, 나머지 두 개 중에서 한 개를 중년 부인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덜커덩 창문이 닫히고 말았다. 창문이 닫힌 방안에서는 도란도란 정겨운 이야기 소리와 함께 네 식구들의 호떡 먹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여왔다.

   나는 어릴 때 한 번도 이러한 가족적 분위기를 맛본 일이 없었다. 일찍이 유복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또 두 형제간의 정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애정 실조증에 걸리어, 홀 어머님 밑에서 살인적인 가난과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자라난 나에게, 이 날 밤 초가집의 흐뭇한 가족적인 분위기는 나에게 있어서 뼈에 사무치도록 부럽고도 그리운 광경이었다.

   이 때부터 나의 머리 속에는 이 초가집 풍경이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의 상징으로서 판이 박혔었고, 내 몸과 마음이 외로울 때 가만히 눈을 감으면, 호박꽃 같은 램프불이 피어있는 그 창문이 머리 속에 떠오르고, 그 속에서 도란도란 정겨운 이야기 소리와 함께 호떡 씹는 소리가 잔잔히 들리어 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원이 되고 한이 되어, 내 형제들은 왜놈의 치하에서 모두가 가정을 버리고, 놈들의 철창 속에서, 또 이역 땅 망명의 길에서 숨져갔지만은, 나 혼자만은 비겁하게도 어떻게 하여서라도 집을 지키면서, 어머님을 뫼셔 알뜰한 가정을 한 번 가져 보고 죽겠다고, 오늘날까지 몸부림을 쳐 왔던 것이다.

   그 때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이 탁류로 흘러가 버린 지금, 나는 초가집보다는 몇 배나 더 큰 콘크리트 집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가족들을 거느리게 되었지마는, 어쩐지 아직까지도 그날 밥의 그 초가집 창가의 광경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근년에 사랑하는 큰 자식놈을 불의의 사고로 잃어버리고, 이따금씩 아내마저 그 거리가 무척 멀어져 가는 밤이면, 나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는 곧잘 이 초가집 창가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면 호박꽃 같은 램프의 불이 피어 있는 초가집 창가에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언제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와 함께 호떡을 씹는 소리가 그 방에서 잔잔히 들리어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운 내 도화 속의 이 초가집도 헐리어져 간데 온데 없어졌고, 스산한 가을비가 내리는 이 외로운 밤을 나는 혼자서 진정 어디로 가야만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