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을 위한 선택

 

성민희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닥터가 혈액검사 결과를 조목조목 알려주고는 이어서 말했다. 내가 물건 이름 서 너 개를 말할 테니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답 하세요. 책상, 창문, 마차, 안경. 몇 개의 단어를 말해 주고는 다른 이슈로 말머리를 돌려버린다. 방금 말 한 물건이 모두 무엇이냐고 내게 다시 물을 줄 알았는데 어떤 운동을 하느냐, 잠은 몇 시간 자느냐? , 뜬금없는 질문이다.

  5분 정도 어지럽게 내 일상을 들먹이며 현혹(?) 시키더니 아까 말한 물건이 무엇인지 말해보란다. 잊어버릴까봐 머릿속에 빳빳이 세워두었던 물건 이름을 똑똑하게 말한다. 책상, 창문, 마차, 안경. 닥터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치매는 아닌가 보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는 또 당 수치가 보드라인이라며 발 검사를 하자고 한다. 얇은 바늘로 발가락을 콕콕 집어보더니 감각이 있느냐 묻는다. 당연히 바늘이 느껴진다고 했다. 닥터가 고개를 끄덕인다. 검사를 모두 통과한 것 같아 기분이 살짝 좋아지려는데 그는 컴퓨터에서 몸을 돌리더니 책상 서랍에서 서류를 하나 꺼낸다. 분홍색 마분지다.

 

  “만약에... 의식이 없어서 심폐소생술을 해야 할 순간이 되면 어떻게 할까요?”

갑자기 머리가 띵해진다. TV에서 보던 장면이 떠오른다. 환자의 가슴을 급박하게 누르는 닥터 모습과 둘러선 간호사의 당황하는 얼굴이. “상태를 보고 인공호흡 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정도가 되면 살리고, 그렇지 않으면 살리지 마세요.”

  닥터가 분홍색 종이에 내 말을 받아 적더니 또 묻는다. 만약에……. 인공호흡기를 꽂고 연명 치료를 해야 할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머리가 또 멍해진다. 내가 이제 그런 경우까지 염두에 두어야 할 나이인가? 양로병원 병상에 누워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난다. 대답도 못하고 흐르는 눈물을 닦는 나를 본 닥터 눈이 갑자기 커진다.

이 질문을 하면 뭘 이런 걸 묻느냐고 화를 내는 사람은 봤어도 우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허허허.”

  닥터가 어린 아이를 놀리듯 앉은 의자를 빙글 돌리며 클리넥스를 한 장 쑥 뽑아준다.

연명치료는 하지 마세요. 그냥 보내주세요.”

  닥터가 분홍색 종이에 내 말을 슥슥 적는 모습을 보며 남편을, 딸을, 아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흐른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시가 생각난다. 연습 없이 살다가 훈련 없이 죽는다? 태어나는 것도 내 의지가 아니었듯이 죽는 것 또한 내 뜻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어느 날 느닷없이 인생 무대에 올려 졌고 뭐가 뭔지 더듬거리며 걸어왔더니 어느새 다 왔다며 무대에서 내리라고 한다. 분명 내 생명이고 내 삶인데. 생사(生死)의 중요한 두 결정에는 나라는 존재가 관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내 능력과 사고(思考)도 아무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기가 막힌다. 그런데 오늘. 정신과 육체가 라는 존재와의 연결 지점에서 달랑달랑 위태로울 때. 그때를 위해 이쪽인가 저쪽인가를 미리 선택해두라고 한다. 이것이라도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자식들을 죄책감 없이 편안하게 해주는 방법이랍니다. 남은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닥터가 목소리의 톤을 낮춰서 심각하게 나를 달랜다.

그래도. 슬퍼요.”

  나는 클리넥스 한 장을 더 받아들고 오피스를 나온다

 

[미주문학]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