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그들 삶의 영웅이었다

 

성민희

 

 

때때로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처음엔 어두운 터널 끝에서 차차 밝아오는 불빛이다가

터널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확 밝아오는 불빛처럼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정호승의 시 불빛일부>

 

  그렇다. 살다보면 가끔씩 내 기억의 어느 지점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삶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기억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다. 스테이지에 불이 켜져야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듯이 나의 인생 무대도 기억이 나는 어느 부분부터 시작 된다. 그 무대에는 많은 사람이 등장하여 무심히 스쳐지나가기도 했고 짙은 흔적을 남겼거나 지금도 나랑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정녕 나였는데 시대와 사건과 사람은 나를 나답게 살지 못하게 했다. 원하지 않는 땡볕에 서서 땀을 흘리기도 했고 계곡 찬 물에 발을 담그거나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과 사건과 사람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1970년대부터 활발히 유입된 한인 이민 1세대가 어느덧 노년층에 접어든 요즈음. 자서전 집필에 관심을 보이는 노인이 부쩍 늘어났다. 그에 부응하여 한인사회의 어느 비영리단체에서 노인 스무 분을 선정하여 구술자서전 집필 작업을 해드렸다.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진중하게 점검하며 아름답게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프로젝트였다.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인 Erik Erikson노년기는 노쇠와 죽음을 앞두고 회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시기라고 했다. 질풍노도의 시기와 안개 속을 걷는 혼돈의 시간,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으로 고단했던 세월을 모두 흘려보내고 이제 더 이상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즈음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삶의 고백이며 성찰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경험과 의식을 밖으로 드러내는 이 작업은 단순히 기억이라는 통로를 통해 과거의 경험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를 들여다보고 지난 삶을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현재의 저울에 과거를 올려놓고 재해석 하는 것이다. 나의 자아(自我)가 몸과 마음에 각인된 빛깔 바랜 기억을 들여다보며 울고 웃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인에게는 과거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치유 하고 나와 화해하는 시간이 되며, 가족이나 자손에게는 정신적인 유산을 물려주는 계기도 된다.

일반적인 자서전이 기술하는 주인공은 영웅이거나 특별한 위인이지만 이 단체에서 기획한 자서전의 대상은 평범한 사람이 살아온 보통의 삶이었다. 나라와 단체에 역사가 있듯이 개인에게도 다양한 삶의 경험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있기에, 한인 동포 한 사람 살아온 삶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이민 역사를 조명해보는 것과 같았다. 또한 1903년 사탕수수 농장 이민으로 시작하여 현재까지. 120년 이민 역사 중의 한 세대를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자서전을 집필하기 위해 인터뷰를 하며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산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멀리서 볼 때는 그냥 나무가 울창한 숲인데 가까이 가서 보면 땅을 헤집고 다니는 벌레와 큰 나무 아래에 피어있는 갖가지 꽃, 하늘을 날아가는 새, 따사로운 햇볕과 축축한 그늘, 산들 바람과 쏟아지는 비도 있다. 사람이 살아온 길도 멀리서 보면 그저 그렇게 두리뭉실한 한 평생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색깔과 촉감이 너무나 다양하고 다채로웠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를 시작으로 해방과 함께 찾아온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6.25 전쟁.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루 사이에 애국자가 되었다가 반동분자가 되기도 했던 혼란의 시간을 모질게 견뎌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해맑은 아이로, 꿈을 꾸는 젊은이로, 나이에 걸맞은 모습으로 세상을 살 수 없었다. 슬픔이나 환희의 감정이나 이해와 용납이라는 단어는 그들 삶에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똑같은 격랑의 세월을 살아내었지만 지역과 가문과 성별에 따라 각자가 겪어온 삶의 모습은 너무나 판이했다. 고통의 강도와 무게도 달랐다. 그들은 각각 특이한 대하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이 분들은 고국을 떠나온 디아스포라였다. 허공의 바람에도 의지하고 모래땅에도 꽃을 심어야하는 치열한 생()을 살아왔다. 음식과 언어와 문화와 자녀교육. 낯 선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그 어느 하나도 그저 거머쥘 수가 없었다. 순간순간 전력을 다하고 영혼에 날을 세워야했다. 그러기에 할 이야기도 더욱 많았다. 돌아보면 그들은 한국의 현대사와 이민역사의 주역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그들의 삶 속에서 영웅이었다. 삶의 의의를 묻는 사람은 그것을 결코 알 수 없고, 그것을 한 번도 묻지 않은 사람만이 그 대답을 알고 있다.’ 루이제 린저의 글이 인터뷰 내내 생각났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세계를 손바닥 위에 올리고 들여다보는 우리는 어디를 가나 한국문화와 음식이 환영을 받는 세상을 산다. 이렇게 풍요와 안정의 세월을 누리지만 먼 훗날 후손에게는 나 역시 이민역사의 주역이 될 터. 내 영혼이 편치 않았던 시간, 고통의 사건과 상황조차 긍정적인 무늬로 남기며 걸어간다면 나 또한 내 삶의 영웅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