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통해서 살고 있니? / 성민희
또 부부싸움을 할 뻔 했다. 이 남자 너무 웃긴다. 내가 매일 한 알씩 먹으라며 식탁 위에 올려둔 강황가루약 Tumeric은 몇 달이 지나도록 쳐다보지도 않더니 난데없이 누런 박스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이것 좀 봐라. 이것 먹으면 면역력도 증진되고 몸 안의 염증도 없애준다네. 나쁜 콜레스테롤도 잡아준대. 아침마다 한 숟가락씩 먹자.”
친구가 좋다고 권하기에 자기도 한 통 사들고 왔단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내가 누런 약병을 남편의 코앞에 들이밀며 빽 소리를 질렀다. 이게 강황가루인데 여태 내가 한 말은 어디로 들었냐고. 눈이 둥그레진 남편이 병에 붙은 라벨을 눈 가까이 대더니 아하! 한다.
이 남자는 매사가 이런 식이다. 내가 말할 때는 건성으로 듣다가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하면 절대 진리로 알고 복종한다. 중요한 자리에 갈 때는 넥타이를 양 손에 하나씩 들고 이게 좋아? 이게 좋아? 묻는다. 내가 오른쪽 것이 더 잘 어울린다고 하면 거울 앞에서 목에 몇 번 번갈아 대어보고는 왼쪽 것을 매고 나온다. 때로는 운동 간다고 나서다가 묻는다. 반바지 입을까? 긴바지 입을까? 날씨가 더우니 반바지 입으라고 하면 바지 몇 개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긴바지를 입고 나선다. 도대체 이해를 해 주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청개구리 놀음이 재미있어서 인지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여자 네 그룹이 와글와글 골프를 쳤다. 계절에 맞지 않게 내뿜는 햇볕의 열기로 골프를 쳤는지 죄 없는 잔디를 파대기만 했는지 분간도 못할 만큼 지쳤다. 준비해 간 물 두 병도 모자라 찬 소다를 마구 마셨더니 뱃속이 출렁이는 느낌이다. 라운딩이 끝나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를 몰고 식당으로 가는 중이었다. 빨간 신호등에 걸려 서 있는데 앞 차의 조수석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친구가 벌개진 얼굴로 쫒아왔다. 차가 갑자기 꼼짝을 안 한단다. 아무 것도 작동을 하지 않으니 이머전시 등을 켜고 뒤에 서 있어 달라는 부탁이다. 트래픽이 심한 퇴근길에 도로 한 복판에서 정지해 버렸으니 위험하기 그지없다. 나는 이머전시 등을 켜고 앞 차를 엄호(?)했다. 차 주인은 이것도 만져보고 저것도 만져보고 몸부림을 치지만 모든 프로그램이 꺼져버린 차는 트렁크 문조차도 열어주지 않는다.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나는 그저 차 안에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배 속에서는 쪼로록 소리가 연신 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서 나타났는지 파란 티셔츠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백인 남자가 다가왔다. 차 주인에게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하며 위험하니 저쪽 인도 위에 가 있으라고 한다. 익숙한 솜씨로 범퍼를 열고 이것저것 만지던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나가던 또 다른 백인 남자가 그 모습을 보고는 길가에 차를 끼익 세웠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나 보다. 차 조수석에서는 부인인 듯한 여자가 내린다. 두 남자가 마주보고 주거니 받거니 의논을 하더니 한 사람은 뒤에서 밀고 한 사람은 운전석에 앉아서 핸들을 잡는다. 일단 차를 안전한 곳으로 옮길 생각인 듯하다. 그런데 웬걸 차는 꼼짝도 않는다.
차에서 이머전시 등이 깜박이건만 아무 생각 없이 뒤에서 나의 출발을 기다리고 서있는 멍청한 차도 있다. 나는 상체를 차창으로 내밀고 비껴 지나가라고 손짓을 하려니 팔도 아프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파란 티셔츠 남자가 내게 오더니 그냥 가란다. 경찰과 토잉카를 불렀으니 잘 해결이 될 거라고 한다. 내가 차를 빼어내자 그는 고장 난 차에 등을 대고 서서 마주 오는 차에게 차선을 바꾸라며 교통순경인양 양팔을 번갈아 휘 젓는다. 두 남자의 등 쪽 티셔츠가 물기를 잔뜩 머금고 몸에 착 달라붙었다.
식당에 도착하여 궁금해 하는 친구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차는 딜러에 맡겼다며 두 친구가 렌트카를 타고 왔다. 백인 남자들 덕분에 일이 쉽게 해결되었다는 말을 들은 여자들이 모두 한마디씩 한다. ‘미국인의 봉사 정신과 휴머니티가 이 나라를 세계 최강국이 되게 하는 원동력이다. 미국 남자들의 신사도는 몸에 배여 있더라.’로 시작하여 ‘미국 남자들이 역시 멋있더라. 한국 남자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 까지 발전했다. 테이블 한 쪽에 앉아 모자를 벗어들고 숨을 고르던 차 주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내가 미국에서 50년 가까이 살았지만 백인 남자하고 결혼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오늘 처음으로 해 봤다.”
갑자기 식당 안이 와아 하는 웃음소리로 가득 찬다. 순간 백인 사위를 본 친구가 살짝 부러워지려고 하는데. 저쪽 귀퉁이에서 누가 한마디 한다. 암만 좋아도 말이 통해야 하는 거 아니야? 모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또 와글와글 웃는다. 그 말도 맞긴 하다. 자상하면 뭐 해. 함께 살아가려면 말이 통해야지. 그래도 한국 남자가 편하다는 분위기로 바뀌려는 찰나, 커다란 목소리가 또 다른 쪽에서 삐쭉 올라온다. “너희들, 한국 남자하고는 말이 통해서 사니?” 식탁 위의 그릇도 데굴데굴 구른다. 맞아. 맞아. 한국남자하고 한국말을 하는데도 말이 통하냐? 이번에는 손뼉소리까지 들린다.
저도 손뼉치며 동감합니다^^
'식탁 위의 그릇도 데굴데굴 구른다'는 표현에 완전 합류하는 느낌이에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