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바보

 

 

 젖은 티셔츠를 손으로 탁탁 털어서 옷걸이에 거는 자신을 보며 픽 웃는다. 아들은 결혼 전에는 이웃사촌이고 장가가면 해외동포가 된다고 하던데. 그걸 잘 알면서도 아들의 빨래를 건조기에 넣지 않는 이건 뭔가. 남편의 옷을 이렇게 정성스레 널어본 기억은 있는가? 당연히 없다.

 

 외국으로 나간 지 2년 반 만에 돌아온 아들이다. 결혼 적령기를 꽉 채운 나이가 된 탓일까. 장발을 하고 공항 터미널 입구에 서 있는 녀석에게서 세월이 스쳐간 자국을 본다. 와락 끌어안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행복을 넘어 오히려 찡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한 시간과 도착 후 첫 식사를 하는 동안이 우리의 밀월 시간이다. 그 시간을 놓치면 녀석의 근황은 물론 마음 나누기도 힘들다. 거침없이 이웃사촌으로 전락한다. 이번 주말에는 친구 결혼식 참석하러 산타바바라에 갈 거고 그 다음 주는 또 비지니스 관계로 샌프란시스코를 들러 뉴욕도 다녀와야 한다. 겨우 3주 일정으로 왔는데 우리하고는 언제 놀까? 물으니 허허 웃는다. 모르겠단다.

 

 무심한 것 같아도 마음은 그렇지 않은지 가방을 풀면서 조카의 장난감을 꺼내어 준다. 누나랑 엄마 화장품도 사왔다. 그것 산다고 헤매고 다녔을 녀석을 생각하니 고맙다 못해 자식인데도 황감하다. 아빠랑 매형 것은 없냐니까 그건 살 시간이 없었단다. “당신하고는 샤핑을 갈 거래. 자기 옷 사면서 아빠 것도 살 거래.” 섭섭한 표정의 남편을 그렇게 달랬다.

저녁을 먹은 녀석이 멜라토닉이 있는가 묻는다. 비행기 안에서 잠을 못 잤는데 푹 자고 싶다고 했다. 약장을 뒤져보니 있긴 한데 유효기간이 일 년이나 지났다. 두 말 않고 차를 몰고 나갔다. 컴컴한 도로를 휘익 달려 새 것을 사 왔다. 몇 알을 더 먹으면 되는데 왜 그랬냐며 아들이 깜짝 놀란다. 유효 기간 지난 약을 먹이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다.

 

 오늘 아침에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녀석의 방문 앞을 지나간다. 남편보고도 조용히 다니라고 눈짓을 했다. 방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남편은 방문을 열고 빼꼼히 들여다보며 아빠 회사 잘 다녀올 께. 인사를 올린다.

한참 뒤 나온 아들의 등에는 백팩이 메여있다. 아침은 엘에이로 나가 친구랑 먹을 거란다. 스토브에는 이틀 동안 푹 고운 곰국이 뽀얗게 끓고 있는데 저건 어쩌라고. 엄마차를 쓰라고 했는데도 기차를 타겠다며 어느새 표를 예매까지 했다.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며 토스트라도 사먹자는 내 말에 전화 컨퍼런스 콜이 있다며 그냥 가라고 한다. 대합실로 들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아, 이제 엄마가 필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껏 들떴던 마음이 풍선에 바람 새듯 내려앉는다. 아들이 온다며 모든 일정을 캔슬 했는데 괜히 수선을 피웠나보다. ‘우리 이제는 라빈에게 더 무심해지자. 그냥 던져두고 바라만 보자.’ 남편과 약속한 말을 되뇌면서도, 아들이 던져두고 간 빨랫감을 손으로 쓸어 주름을 펴가며 옷걸이에 건다.  (중앙일보 10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