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의 변이(變移)
성민희 / 수필가
여고시절이었다. 진주가 고향이라는 40대의 옆집 아저씨는 아내를 부를 때 꼭 ‘아요’라고 했다. 처음에는 담 너머 그 소리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자꾸 듣다보니 언짢았다. 사랑하는 아내한테 허니라고는 못할망정 지나가는 사람 부르듯 하다니. 그 아내는 왜 영혼 없는 호칭에 항의를 안 하는지 답답했다. 어느 주말 오후. 또 들려오는 “아요” 소리에 나는 혼잣말로 커다랗게 “모르요” 해버렸다.
내가 결혼 할 무렵에는 남편의 호칭이 ‘아빠’였다. 공공장소에서 멀쩡한 새댁이 제 나이 또래의 남자에게 “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에 어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차마 여보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워 어물거리다가 첫아이를 낳자마자 그 호칭을 갖다 붙였다. 아이들이 다 자라고 손녀까지 본 나이인 지금도 변함없이 남편은 나의 ‘아빠’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남자가 우리 아이에게도 아빠라는 것이다. 한 남자를 두고 모두 아빠라고 불러대니 그게 이름인 줄 알고 다섯 살 박이 손녀도 아빠라고 한다. ‘할비’하고 부르다가 급하면 ‘아빠’다.
얼마 전 친구 일곱 커플이 동유럽 여행을 갔다. 한 친구가 앞서가는 남편을 부르느라 “아빠”하니 짓궂은 남자 서너 명이 고개를 돌려 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뉘 집? 뉘 아빠?”
지난 봄에 남편을 여읜 친구의 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아빠, 아빠하며 울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큰 조카가 농담을 했다. "엄마의 아빠는 20년 전에 한국에서 돌아가셨는데 아직도 여기서 찾으면 어떻게 해요?" 놀란 언니가 눈을 크게 뜨며 희미하게 웃었다. “내 아빠 말고 너희들 아빠 말이다. 잉잉”
위 세대부터 시작된 호칭이 우리 또래까지 내려와 한창일 때 ‘자기’라는 새 호칭이 등장했다. 친구보고도 자기, 연인보고도 자기, 남편보고도 자기라고 했다. 자신을 지칭하는 자기(自己)라는 단어를 상대방을 부를 때도 사용한다는 것이 참 어색했지만 세월이 지나며 어느새 그것도 일상어가 되었다. 좋은 사람에게만 허용하는 정다운 호칭이 된 것이다. 어느 날 아파트 복도를 지나다가 두 사람이 씩씩거리며 다투는 소리를 듣고 웃음이 터졌다. “내가 왜 자기한테 자기야?”
요즈음 아이들은 한술 더 떠서 남편을 ‘오빠’라고 부른다. ‘우리 오빠’ 운운하면 자기 친 오빠를 부르는 건지 남편을 부르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괜히 사람들 앞에서 내 오빠를 부를 때는 다른 사람이 오해를 할까봐 조심스럽다. 세월이 흘러 이 아이들도 자녀와 손주 앞에서 오빠라고 불러대면 헷갈릴 게 뻔하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언어의 사용처도 변해간다.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나 오빠라고 하는 것이나 모두 비정상적인 호칭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문화로 익어가는 것에 평범한 우리는 그저 따라갈 뿐이다. 인간의 가치도 변하고 언어의 뜻도 변해 생각지도 않은 단어가 덜컥 사랑의 실체, 한때는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으로 승격되는 세상이니…. 과연 다음 세대에서는 또 어떤 단어가 그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지 자못 궁금하다.
<이 아침에> 9/2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