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 1 첫째날

11am

오늘 부터 사흘 간 멕시코 깜보 지역으로 의료 선교를 떠난다. 모두 12명의 의사와 간호사, 약사, 한의사가 함께하는 여행이다. 아침 7:30 출발. 4시간 반을 달리니 멕시코 국경이다. 들어가는 줄이 만만하지가 않다. 멕시코 국경 경비대가 차를 뒤져본다. 미션이라고 하니. 입던 옷은 싫어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짐을 스캔해본다네. 새 옷과 물건만 반입. 자존심이 있어서? 소금과 설탕을 따로 가방에 넣고 왔는데 백색가루가 마음에 걸린다. 

국경이란 표시가 고무 범퍼를 울렁 넘는거다. 사진도 자동으로 찍힌다. 차를 통채로 스캔하고 사람은 옆길로 빠져 나간다. 우리는 난민촌 텐트 같은 데에 앉아서 검사 받은 차가 오길 기다린다. 수상한 차는 모든 짐을 다 내려서 검사한다고 하는데 ... 부디 무사 통과하길...


11:40am

약 40분을 기다리고 앉아 있으니 우리 차가 통과되어 나온다. 땡큐 땡큐 만면에 미소를 띠며 손을 흔들었는데도 저어 쪽으로 가서 서라고 한다. 

길 건너에도 짐을 잔뜩 실은 차들이 서있다. 텍스를 내라고 한다. 6500 페소. 346불 쯤 된다. 자기네 아이들 주려고 가져가는 선물에도 텍스를 매긴다. 할수없지. 우리는 미국 사람... 가볍게 텍스를 내고 떠난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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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 pm

국경을 넘어 미국인이 휴양지로 많이 찾는 바닷가 엔세나다를 지나 3시간을 더 달려서 선교지로 간다. 
오른쪽은 흙더미가 슬슬 굴러내리는 산등성이고 왼쪽은 깊은 절벽이다. 좁은 이차선 도로를 따라 산 고개를 넘는데 유튜브에서 본 중국의 꼬불꼬불 기암 절벽이 생각난다. 도로는 좁고 돌과 흙더미가 굴러내리니 한 차선을 막아놓고 한쪽 방향의 차만 보내고 있다. 한참을 차가 가지 않아서 앞에서 차가 고장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차 사이로 아이들이 아이스크림통을 메고 다닌다. 
가도가도 끝이 안보이는 사막 땅을 달려 4:40pm에 드디어 도착했다. 시간 절약하느라 점심도 차 안에서 김밥으로 떼우며 무려 10시간을 달려왔다. 
넓은 사막 한복판에 길다란 일층짜리 건물 몇 개가  보인다. 

여기가 이종식 선교사님이 섬기는 깜보의 사역지다. 선교사님은 현지 선교는 물론 한국 등지에서 오는 선교사 후보 훈련을 위한 사역도 하신다. 그들이 묵을 숙소 건물 맞은 편에는 교회가 있다. 선교사님과 도와주시는 선교사 후보 부부, 아이들의 영어를 가르쳐 주는 장로님 한 분이 동역자다. 그리고 8명의 아이들 양육도 맡아있다. 이 아이들은 너무 가난하거나 양육이 어려운 수준의 아이라고 한다. 

 아이들과 개가 뒤엉켜 뛰어 놀다가 차를 보고 달려나와 반긴다. 간단히 감사 기도를 드리고 의료팀은 30분 걸려 가는 마을로 떠났다. 4명의 교인이 있는 교회의 전도를 도와준다고 한다. 교인들을 중심으로 그 동네 사람들에게 진료를 해준다고 했다. 

 

5pm

의료팀이 왁작 떠나고 이영남 권사님과 둘이서 저녁밥을 지었다.  화장실도 부엌도 먼지 풀풀 날리고 냄새도 역하고 사람 사는 환경이라고 도무지 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히 물은 지하수를 퍼올려 쓰는 덕에 깨끗하고 풍성하다. 김치와 돼지고기를 넣어 김치찌개를 하고 어제밤 세시까지 만들었다는 영남 권사님표 밑반찬과 김으로 저녁상을 차렸다. 

저녁 8시가 되어 모두 허기 지고 피곤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차려놓은 밥상을 보고 너무 행복해하신다. 의료진이 아닌 분들은 말이 안통해도 손짓 발짓으로 의사의 처방을 다시 설명해 주었단다. 약 두 시간 동안 무려 37명이나 진료를 했다고 한다. 완전 북새통이었노라고 마치 승전한 용사들 처럼 흥분이다. 누가 페이를 해줄테니 연휴에 나가서 환자를 보라고 하면 오케이 할 사람이 있을까? 짐을 잔뜩 실은 좁은 차 안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며 무려 열 시간을 시달리고 달려온 것도 모자라서 또 환자를 치료하고. 어둑어둑한 저녁에 돌아와 맛있게 밥을 먹는 착한 하나님의 백성들. 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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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 2, 2018 

 

 

 

7:27am

 

새벽에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바닷가로 갔다차를 몰고 10분쯤 달리니 바다가 나왔다이른 아침이라 뿌연 안개가 온 바다를 덮고 있다.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침몰하여 떠내려왔다는 배 한 척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해변에 누워 파도를 맞고 있다얼마나 많은 젊은 청년들이 희생되고 그 가족의 눈물이 있었을까새까맣게 녹슨 폐선의 뼈를 보며 잠시 숙연해진다.

 

돌멩이가 참 예쁘다며 모두 하나씩 들고 즐거워한다자연 앞에서는 어떤 사람도 어린아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하나님의 피창조물 중에 변한 건 오직 인간 뿐변하지 않은 창조물은 우리 안에 내재된 순수함과 천진함을 마구 꺼집어 내는 위력이 있다뒤틀린 고무줄을 도로 풀어주면 제 자리로 돌아가버리는 것처럼 우리들 안에 뒤틀린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 주신 본연의 순수함으로 되돌려 주는 건 오직 말씀과 기도가 아닐까암만 바쁘고 복잡해도 그것만은 놓치지 않고 살아야할텐데...

 

숙소로 돌아오니 기어이 남아서 아침상을 준비하겠다는 이영남 권사님이 떡만두국을 해 주었다. (나는 본분을 망각하고 바다를 보러갔다.)

모두 맛있게 먹고 주일 아침 예배를 드렸다.

 

 

Sept. 2, 1pm

 

숙소에서 차를 몰고 15분쯤 가니 연립주택처럼똑같이 생긴 집이 한무리 있다근래에 지은 주택가인가 보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시골 동네에 새로 연립 주택이 들어선 그런 모양새다집집마다 TV는 있는지 안테나가 달려있다지붕 위에는 시커멓고 큰 둥근고무통이 있는데 그건 물통이라고 한다집안에 사용하는 물은 모두 이곳에 모아두고 수도꼭지를 설치하여 물을 내려서 쓴다.

우리 밴이 어린이 찬송가를 확성기로 울리며 주택가 앞의 커다란 공터로 들어서니 구석구석에서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나온다마치 초등학교 시절 여름 방학만 되면 확성기를 들고 나타나던 교회의 언니 오빠들 생각이 난다그들은 어린이 찬송가를 크게 틀고는 온 동네아이들에게 율동을 가르쳐 주었다그러고는 교회로 데리고 갔다거기에는 과자랑 사탕연필과 공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긴 여름 방학 어느 순간이 참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그때는 뭔지도 모르고 뛰어다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전도 사역이었나 싶다옛날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님은 기성세대 선교도 중요했지만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년을 겨냥하여 학교 설립에 힘을 많이 쏟았다미래를 내다보며 초석을 다진 작업이었다이종식 선교사님도 이런 맥락이다멕시코를 이끌어 나갈 미래의 지도자를 그리며 2세 전도에 힘을 쏟는다.

U-Haul 처럼 생긴 밴에서 테이블을 꺼내어 펴고 의자를 내려 자리를 잡는다아이들도 익숙한 듯 몰려들어 하나씩 거들어 금방 간이 예배당이 된다올망졸망 모여앉은 아이들을 살펴본다동생을 데리고 나온 아이는 동생을 챙기느라 바쁘다신발이 없어 맨발인 아이도 눈에 띈다.

 

선교사님이 미래의 목회자로 키운다며 분신처럼 데리고 다니는 열 더댓살의 호세가 앞에 나가서 설교를 하고 아이들을 불러내어 찬양에 맞추어 찬양율동도 한다하나 둘 수줍은 듯 앞으로 나가던 아이가 어느새 열명이 넘고아이들은 호세의 인도에 따라 율동을 한다몇 곡의 노래가 끝나자 호세가 자진해서 나와 찬양율동을 한 아이에게 오레오 쿠키를 하나씩 나누어준다봉투를 뜯어 그 자리에서 먹는 아이도 있는 반면 고이 감싸고 쥐고 있는 아이도 있다머리가 긴 여자아이 하나가 과자를 받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들어가더니 한참 뒤에 나왔다손에는 반으로 줄어든 과자 봉투가 쥐어져있다집에 동생이 있을까병들어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가 있을까겨우 여섯개가 들어있는 쿠키를 나누어주고 오는 모습에 마음이 찡하다 황토흙이 잔뜩 묻은 맨발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Sept. 2. 3pm

 

다시 짐을 꾸려 10분을 더 달려서 어느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이 집의 주인인 할머니가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서 딸네 식구는 물론 동네 사람에게 집을 오픈하여 예배를 드린다딸 집 아이들은 네 명이 모두 글을 몰라 선교사님이 데려다가 글도 가르쳐주고 말씀도 가르친다고 한다선교사님이 기거하는 곳에는 숙소가 여러개 있는데 그 중 몇 곳은 집이 너무 가난하여 보내어진 아이공부를 못 시켜서 보내어진 아이들이 위탁 양육되고 있다옛날 우리 나라에 주둔했던 미군이 불우아동을 도와주던 모습과 비슷하다그 도움으로 훌륭하게 되신 분이 떠오른다백악관 교육부 차관보까지 지내신 고 강영우 박사상원의원을 지내신 신호범 박사 등이 대표적인 사람이지만 그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내 친구 중 한명도 미군에게 영어를 배워 통역을 하며 다니더니 중학교를 졸업하자 곧 미국으로 들어갔다고등학교 3학년 때침례교회에서 주선하는 어느 집회에 갔더니 그 아이가 우리는 상상도 못할생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멋진 아가씨가 되어서 본부 목사님 통역을 했다먼 세계의 신데렐라를 보는 기분이었다이 아이들도 잘 자라서 목사님의 동역자가 되면 하나님을 전파하는 그 지역의 선교사가 되겠지어린이 선교의 미래를 보는 마음이 흐뭇하다.

우리 차가 도착하여 의자를 내려 마당을 간이 예배당으로 만들었다선교사님과 도와주시는 또 다른 선교사 내외분이 다른 마을로 떠난다워낙 깡촌인 덕분에 마을도 뚝뚝 떨어져있고 차도 없어서 일일이 차로 픽업을 다닌다고 한다.

 

거의가 카톨릭 신자인 이 지역에서 여간한 사명과 열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우리 일행은 의료선교 일정 때문에 모인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아이들이 자꾸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뭔가 귓속말로 속삭인다왜 그런가 하고 돌아보니 내가 입은 티셔츠 때문이다어느날 두 손녀와 앞마당에서 놀고 있는 내게 카메라를 들이밀던 조카가 만들어준 티셔츠다사진이 프린트 된 티셔츠를 처음보는 모양이었다그림 속의 여자와 내가 같은 사람이라며 손가락으로 티셔츠를 가리켰다가 나를 가리켰다가 한다내가 그림을 펼쳐보여주니 손뼉을 치며 신기해 한다가지고 간 아이패드도 신기한지 이리저리 뒤적거린다지금 생각하니 아이들 얼굴을 한 명 한 명 찍어왔으면 좋았을걸 싶다크리스마스 선물로 자기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선물하면 얼마나 좋아할까예수님 품에 안긴...

 

Sept. 2, 4pm

 

할머니 집에서 약 30분을 더 달렸다사막을 가로질러 꼬불꼬불 산고개를 넘어 도착한 곳은 약 85가구가 모여사는유달리 카톨릭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조그만 동네다높다란 둔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양철지붕의 길다란 건물이 보건소라고 한다미리 보건소장과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듯 선교사님이 가더니 보건소장을 모시고 온다. 40대 중반쯤 보이는 후덕하게 생긴 여자다의사간호사약사한의사님이 모두 일사분란하게 가운을 입고 자기 살림을 차린다휑하던 보건소 안이 어느새 의약품 냄새를 풀풀 풍기는 병원이 되었다.

30분을 기다리니 소문이 났는지 사람이 모여든다류동목 장로님은 입구 작은 테이블에 앉아서 접수를 받고 장정호 집사님은 부인 장윤미 집사님에게서 최학선 권사님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며 땀을 뻘뻘 흘리며 너무나 열심히 도우신다.

주민은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라 접수를 받는 류동목 장로님이 약국으로 진료실로 불려들어가기도 한다가끔씩 접하는 히스페닉에게서 배운 단어 몇 개 가지고 통역관 노릇을 하고 있으니 출세를 해도 이만저만 한 게 아니다배가 아프다는 한 남자를 데리고 들어가서는 배응구 의사선생님께 배가 아프다고 하네요그냥 소화제하고 비타민을 주면 되겠어요." 해서 한바탕 웃는다엉터리 통역에 처방까지 하는 얼렁뚱땅이다.

다행히 동네에서 예배를 마치고 늦게 도착한 이종식 선교사님의 유창한 통역이 있어서 그 뒤에 오는 사람들은 아무 피해(?) 없이 정확한 진료와 처방을 받았다다음에 올때는 꼭 통역관이 준비되어야한다는 반성이 있다.

 

그렁저렁 세 시간 가량 진료에 약 40여 명을 보았다인구 밀도가 높지 않은 까닭에 우리의 수고에 비해서 결실이 작다는 반성도 있다효율적인 의료선교를 하려면 사람이 더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으로 가자는 의견도 있다.

 

Sept. 2, 11pm

 

밤 11시나 되어서 자리에 누웠다모두 피곤한지 금방 잠에 빠져드는데 나는 도무지 잠이 안 온다낮에 아이들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저녁밥을 하느라고 냄비를 들고 마당에 들어서니우리가 나눠 주려고 가져간 물건을 아이들이 뒤진 모양이었다입에 롤리팝을 하나씩 물고 손에는 캔디를 들고 뛰어다녔다.

어제 도착하자마자 마당 한켠에 있는 테이블 위에 신발과자학용품 등이 담긴 검정 쓰레기 봉지를 쌓아두었다아이들이 손을 대지 않는다는 선교사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아무 생각없이 쌓아두고 다녔는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니다비록 가난하기는 하지만 순수하리라고 여겼는데 실망스러웠다배반을 당한 느낌이었다.

내가 나타나니 아이들이 깜짝 놀라 캔디를 뒤로 숨긴다뜯어진 봉지를 내려다보니 마음이 불편했던지 자진해서 신고(?)를 했다캔디를 꺼냈다고 했다또 한 아이는 신발을 뒤져서 꺼내었는지 한쪽 발을 들고는 신고 있는 새 신을 보여준다새까만 다리 아래로 신발이 유난히 희다내가 고개를 가로 저으니 모두 눈이 똥그래져서 쳐다보았다. “도도 마니하나” (모두 내일). 손가락을 양옆으로 저으며 하는 나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신고 있던 신발을 도로 비닐 봉투 안에 밀어넣었다.

 

지금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그냥 신으라고 할걸어차피 그 애들이 가질 것인데그러나 내일 그 신발이 그 아이에게 간다는 보장은 없다마음 졸이며 그 신발을 탐할 아이를 생각하며 후회를 한다도덕성을 가르쳐야한다는 성급한 생각이 어린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멕시코 깜보 이종식 선교사님 사역지 방문 일지 (세째날)

Sept. 3, 2018

11am

아침 식사를 일찌감치 끝내고 단체사진 촬영을 했다. 감사기도도 하고 귀가길에 오른다. 전혀 적응이 될 것 같지 않았던 잠자리와 화장실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니 떠나는 시간이다. 다행히 모기는 없었다. 전날 우리의 식탁 밑으로 기어오던 손바닥만한 독거미를 보고 혼비백산한 일 외에는 별 탈없이 잘 보냈다. 모기도 없는데 꼭 모기향을 피우고 자라고 하던 선교사님의 말씀은 이런 벌레의 출입을 막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벌레에 물린 사람도 없다. 
꼬불꼬불 산길 한쪽을 막아두는 절벽에 와서 또 30여분을 보낸다. 올때는 영문을 모르고 기다렸는데 이제 이유를 알고나니 여유가 생겼다. 도연섭 장로님이 오시더니 빨리 나오라고 하신다.  차 밖으로 나와 팔다리 운동을 하라고. 
한 시간을 더 달려 엔세나다(?) 시가지를 지나며 꼭 들러야 할 전통 타코집에 차를 세웠다. 멕시코에 오면 반드시 이곳에 들리는지 몇 번 와보신 최학선 권사님이 타코집에 들릴거냐며 계속 확인을 하신다. 맛은? 나는 미식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분들은 너무너무 맛있다며 행복해 한다. 

 

1:40pm

약 세시간을 더 달려 드디어 국경 입구 San Diego USA Border에 들어섰다. 입구에 들어서자 두 차선의 복판에 서서 한쪽 차선으로 가라며 노선을 유도 하는 청년이 있다. 우리 차를 운전하시는 이종헌 집사님이 익숙하게 그 청년의 손가락을 무시하고 바깥 차선을 지킨다. 그 차선으로 들어간 차에는 두 명씩 청년들이 붙어서서 걸레로 유리창을 닦고 있다. 그러고는 돈을 받아챙긴다. 순진한 첫 나들이 여행객은 영낙없이 당할 수 밖에 없다. 
서서히 차가 밀리더니 이종헌 집사님이 엑셀을 밟았다가 브레이크를, 그리고는 파킹으로 기어를 바꾸어 놓고 한참을 기다리기도 한다. 도로가 마치 파킹장인듯 차 사이로 잡상인이 다니며 물건을 들어올려 창문 너머로 보여준다. 도너츠부터 가방, 악세사리, 심지어는 강아지도 들고 다닌다. 꾀죄죄한 종이컵을 들고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아이가 있어서 내려다보니 동전을 넣으라는 시늉을 한다. 
한국의 포장마차 같은 이동 수레에서 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쥬스를 갈아서 들고 다니기도 한다. 유리창을 닦아주고 돈을 받고,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르는 청년들도 있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즐기는 축제의 장 같기도 하다.  

옆 차의 창문이 내려오더니 백인 여자가 손을 내밀어 멀리에서 악세서리를 파는 여자아이에게 가까이 오라고 한다. 여자아이는 재빨리 차를 이리저리 피해서 다가온다. 여자는 커다란 프라스틱 보따리를 내민다. 투고우 음식이다. 아이는 그걸 받아들고는 부리나케 차선을 빠져나가 길가 둔덕에 가더니 풀어본다. 거기서 먹을 요량 같다. 뭐가 들었는지 나도 궁금하다. 그런데. 아이는 푼 비닐 보따리를 다시 야무지게 싸매고는 도로 들고 나온다. 아, 가족에게로 가는 모양이다. 


4pm

국경 입구에 들어선 지 세 시간 째. 오른쪽 길이 온통 상점이다. 말로만 듣던 티화나 국경 시장인가 보다. 많은 한인들이 여기에서 장사를 한다고 들었다. 자바 시장 매상의 많은 부분을 이들이 채워준다고 하던데. 상점마다 물건이 풍성히 채워져있다. 우리의 이민 선배들은 어떻게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장사를 할 생각을 했을까. 물건을 싣고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하는 그들의 강인한 생활력이 경이롭다.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도 앞으로 서너 시간은 더 걸릴거라고 한다. 평소에도 국경 통과에 너덧 시간은 걸리는데 오늘은 연휴가 끝나는 날이라서 더욱 심하다. 관광객도 있지만 미국에 사는 히스패닉들이 가족을 보러 많이 온 탓이다.  

버스로 여행을 하다보면 항상 화장실 사용이 문제인데 그걸 노리는 상술이 대단한 가게를 본다. 평수로 치면 세 평 정도밖에 되지 않을 곳에 입구를 비롯하여 세 개의 화장실을 만들어 놓고 통로에서 75센트를 받는다. 들어갈때는 휴지를, 나올때는 손닦을 종이를 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리는지 주인의 손가락, 눈짓에 고객(?)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히스패닉 여자가 이렇게 위대해 보일 때도 있다. 

 

7:10pm

드디어 미국으로 들어선다. 국경 통과다. 입구에 들어선 이후 거의 여섯 시간 걸렸다. 차가 한대씩 톨게이트로 들어서면 미국 국경수비에게 여권을 모두 거둬서 준다. 남자가 근엄한 얼굴로 여권을 들여다보며 한사람씩 이름을 부른다. 영남? 예~쓸, 민희? 예~쓸, 우리는 마치 죄인인양 최대로 인자한 얼굴을 연출하며 대답을 한다. 그는 여권 사진과 우리 얼굴을 대조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저 고맙다. 
드디어 우리 버스 승객 다섯명의 검색이 끝나고 야호! 국경을 통과했다. 눈 앞에 보이는 5번 프리웨이. 파란 표식의 간판이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다. 역시 우리의 고향은 엘에이. 우리는 다시 미국시민으로 돌아와 프리웨이를 씽씽 달린다. 우리가 사는 엘에이는 천국이라고. 이곳에 뿌리 내리고 살 수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선교 사역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몇 시간을 더 달려 얼바인에서 저녁을 먹었다. 배응구 장로님께서 특별히 노고를 칭찬하며 대접해주셨다. 교회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다. 그 늦은 시간에 김윤진 목사님이 나와서 맞아주시니 피로가 풀려버렸다. ^^*

 

오며가며 10시간 넘게 묵묵히 운전을 해 주신 장정호 집사님과 이종헌 집사님은 몸살을 안 하실지 모르겠다. 궂은 일은 젊다는 죄(?)로 두 분이 모두 도맡아 해 주셨다. 친절하고 성실하게 진료와 치료를 해 주신 배응구 장로님, 김승웅 집사님, 최학선 권사님, 김경희 권사님, 최학자 권사님, 노화득 권사님, 사진 촬영을 위해 젊은이 못지않게 활약하신 도연섭 장로님, 그리고 열심히 접수를 맡아주신 류동목 장로님. 최선을 다해 식구들을 먹이느라 수고하신 이영남 권사님께 하나님의 특별하신 위로와 축복이 임하시길 기도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