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뒤척이는 젊음과 사랑

 

성민희 / 수필가

 

새벽부터 출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어머니를 생각한다. 벌써 두 달째 작은 병실 창가에 누워 시간을 버리는 어머니. 아흔 두 살의 나이에서 두 달이란 얼마나 어마어마한 세월인가. 앞으로 얼마큼이나 더 버텨야 일어설 수 있을까. 안간 힘으로 재활 훈련을 받는 모습이 떠오른다. 앙상한 손등 어디에 그렇게 새파란 힘줄이 숨어있었을까. 연한 나뭇가지 같은 몸 어느 구석에서 저런 결기가 돋아 나올까. 어머니는 가쁜 숨을 푸푸 쉬며 매일 헬스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다.

오랜만의 햇살이 봄을 몰고 온 날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동생이 구입한 건물을 흐뭇한 마음으로 올려다보다가 미처 사람을 보지 못한 차에 들이 받힌 것이었다. 아이처럼 가벼운 노인이 쿵 소리가 나게 차에 부딪히고는 공중에 붕 떴다고 했다. 꿈인가 생시인가 멍하니 쳐다보는 동생들 앞에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어머니.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로 가더니 이내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임종을 뵈옵는가 싶은 우리들의 당황스러움과는 달리 모든 검사 결과는 의외였다. 어느 한 곳의 골절도 뇌 손상도 없었다. 왼쪽 발목과 어깨, 엉덩이 부분이 심하게 타박상을 입어 거동이 어렵긴 하지만 천사들이 받아 안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기적이었다.

그 연세가 되도록 한 번도 자식의 신세를 지지 않던 분이 육신의 기를 온통 침대에 내려놓았다. 바쁜데 오지 말라며 손사래로 사양하던 가족의 방문을 침대에 누워서는 반갑게 맞으신다. 하루가 얼마나 적막한지 짐작이 간다. 매사에 무심한 나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마음이 젖는데 어머니는 오죽하시랴 싶어 아침부터 서둘렀다.

차창에 흘러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빨간 간판의 건물이 보인다. GENESIS. 여느 때처럼 어머니는 베개에 등을 대고 앉아 계신다. 회전의자를 침대에 끌어당겼다. “요새는 와이리. 비가 자주 오노.” 창밖을 내다보는 시선이 예전 같지 않다. “하나님도 내 슬픈 마음을 아시는 모양이다. 자주 하늘을 울게 하시네.” 눈가가 발개진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전혀 내색을 하지 않던 어머니에게 이런 슬픔이 있었구나. 아흔 두 살의 나이에는 고통에도 외로움에도 익숙해져서 그 느낌의 강도가 우리하고는 다른 줄 알았는데. 혼자서 일어나고 먹고 자고 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는데.

어느 노인이 남겼다는 편지가 생각난다. ‘... 간호사들이여, 무엇을 보고 있는가... 멍한 눈에, 까다로운 늙은이라고 생각하나?,,, 이제는 눈을 뜨고 바라봐주시게. 무너져 내린 몸에서 우아함과 활기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이 늙은 시체 안에는 여전히 젊은이가 살고 있어... 내가 겪었던 기쁨과 지나왔던 고통을 기억할 때면 다시 내 안에서 사랑으로 가득한 생명을 느끼네. 까다로운 늙은이가 아닌, ''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 봐주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생생한 젊음과 사랑이 아직도 어머니의 몸 안에서 기척을 하나보다. 나는 어머니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하늘을 본다. “하나님, 우리 엄마 마음 아시죠?”

 


<전원 창립 50주년 기념문집> 2018,4  <아침향기> <창조문예> 2018년 12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