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연하게 지키는 내 안의 성城
성민희
은행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멈칫했다. 오랜만에 왔더니 손님의 입출금을 도와주는 공간이 엄청 좁아졌다. 온라인 뱅킹 사용 후 나의 은행 출입이 뜸해진 것처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터. 고객의 방문이 줄어든 만큼 공간도 축소되었다. 달러를 유로로 바꾸는 서류에 사인을 하는데 방금 현금을 찾아 나갔던 옆 창구의 남자가 도로 들어왔다. “돈을 세어보니 10불이 더 왔군요.” 허둥지둥 바빴는지 가쁜 숨을 몰아쉰다. 10불을 돌려받은 여자은행원은 하얀 손가락을 흔들며 땡큐, 땡큐,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저 남자의 정직한 처신도 자존심 때문인가? 내 딸처럼? 나도 모르게 Good guy,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딸의 고등학교 시절. 식구들이 샌디애고로 나들이를 가는 중이었다. 남편은 면허증을 갓 취득한 딸에게 운전대를 맡겼다. 생전 처음 프리웨이에 오른 딸은 어찌어찌 아버지의 안내를 따라 두 사람 이상 탑승을 해야 이용할 수 있는 카풀레인(carpool lane)으로 들어갔다. 얼마를 갔을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앞만 보던 딸이 갑자기 운전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엄마, 무서워” 왼쪽의 방지벽을 따라 운전하는 것이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운전해. 남편은 다독거렸지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듯 딸이 울먹였다. 그렇잖아도 불안한 운전인데 눈물까지 흘리다니. 나는 당황하여 카풀레인 밖으로 어서 나가자고 했다. 그런데 딸은 응, 응, 대답은 하면서도 계속 직진을 했다. 옆 차선이 비었다고 재촉을 해도 고개만 저었다. 나갈 수 있는 구간(exit lane)이 나와야 나갈 거란다. 지금이 교통법규 지킬 때인가. 기가 막혀하는 내게 던져준 딸의 말이 놀라웠다. “나는 절대로 정직하지 않은 일은 안 해. 어떤 작은 규칙도 지키는 것이 나의 자존심이야.” 뜨거운 느낌이 울컥 심장에서 솟구쳤다. 딸은 자신을 귀한 존재로 여기고 스스로 품위를 높이며 살고 있었다. 고등학생 어린 아이가 자기 내면에 조각한 자존심의 실체가 놀랍고 대견했다.
자존심이라고 하면 한신의 일화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그는 살고 싶으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보라는 불량배의 억지에 대항하지 않았다. 땅을 엉금엉금 기는 과하지욕胯下之辱을 당했지만 자존심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그런 모멸쯤이야 자존감을 다치게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에 유방과 함께 한나라를 세울 큰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무릎을 꿇은 카노사의 굴욕 사건도 마찬가지다.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대립을 하던 중 파문까지 당한 하인리히는 맨발로 눈밭을 걸어서 교황이 있는 카노사를 찾았다.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가 불안하자 교황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성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사흘 밤낮을 금식하며 용서를 빌었다. 살을 에는 추위의 눈밭에서 행해진, 초라한 수도사 차림의 읍소가 그에게는 얼마나 엄청난 수치와 굴욕이었을까. 그러나 견뎌내었고 결국에는 내전에 성공하고 돌아와 자신을 파문했던 교황 그레고리오를 쫒아내었다. 그의 자존심 역시 타인에 의해 상처 받는 수준이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상대방으로부터 존중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 때 자존심이 상했다느니 자존심을 다쳤다느니 한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자존심에 조그만 생채기가 나면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정精도 아무런 의미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기에 인간관계는 유리그릇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친한 친구끼리의 다툼이 안타까워 화해를 시키려고 주제넘게 나섰다가 오해를 받았다. 두 사람은 서로 자기편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했다. 졸지에 박쥐 신세로 전락한 나는 선의가 매도되는 것 같아 부아가 났다. 자존심도 상했다. 나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서버렸다. 생각하면 철없는 시절이었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휘둘리는 자존심은 얼마나 유아적인가.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듯 자아가 건강한 사람은 쉽게 자존심을 다치지 않는다. 나의 존재가치가 크고 자아개념이 긍정적일수록 더욱 그렇다.
진정한 자존심이란 스스로가 감시자가 되어 자신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안의 정직과 진실, 순결을 지키는 결의決意다. 타인의 시야나 잣대에 의미를 두지 않는 우아한 해탈解脫이다.
돈 10불을 돌려주고 나가는 남자. 중국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도 내 딸처럼 은연하게 지키는 성城이 자기 안에 있는 걸까. 뒷모습이 참으로 견고하다.
<좋은수필> 2018년 여름호
[1500자 에세이]
진정한 자존심
성민희 / 수필가
유럽 여행을 위해 달러를 유로로 바꾸고 있는데 현금을 찾아 나갔던 옆 창구의 남자가 도로 들어왔다. “돈이 10불 더 왔군요.” 허둥지둥 바빴는지 가쁜 숨을 몰아쉰다. 하얀 손가락의 여자 은행원은 땡큐, 땡큐,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저 남자의 정직함도 자존심 때문인가? 내 딸처럼? 나도 모르게 Good guy,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딸의 고등학교 시절. 샌디애고로 나들이를 가는 중이었다. 남편은 면허증을 갓 취득한 딸에게 운전대를 맡겼다. 생전 처음 프리웨이에 오른 딸은 어찌어찌 아빠의 안내를 따라 카풀레인(car pool lane)으로 들어갔다. 얼마를 갔을까. “엄마, 무서워” 왼쪽의 방지벽을 따라 운전하는 것이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두려움에 울먹거렸다. 나는 당황하여 카풀레인 밖으로 어서 나가자고 했다. 그런데 딸은 계속 직진을 했다. 옆 차선이 비었다고 재촉을 해도 고개만 저었다. exit lane이 나와야 나갈 거란다. 지금 교통법규를 지킬 때인가. 기가 막혀하는 내게 던져준 딸의 말이 놀라웠다. “나는 절대로 정직하지 않은 일은 안 해. 어떤 규칙도 지키는 것이 내 자존심이야.” 뜨거운 느낌이 울컥 심장에서 솟구쳤다. 딸은 자신을 귀한 존재로 여기고 스스로 품위를 높이며 살고 있었다. 고등학생 어린 아이가 자기 내면에 조각한 자존심의 실체가 놀랍고 대견했다.
자존심이라고 하면 한신의 일화가 생각난다. 그는 살고 싶으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보라는 불량배의 억지에 대항하지 않았다. 땅을 엉금엉금 기며 과하지욕(胯下之辱)을 당했지만 그의 자존심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그런 모멸쯤이야 자존감을 다치게 할 만큼 가치가 없었다. 그는 후에 유방과 함께 한나라를 세울 큰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흔히 상대방으로부터 존중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 때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자존심에 생채기가 나면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정(精))도 아무런 의미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기에 인간관계는 유리그릇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친한 친구끼리의 다툼이 안타까워 화해를 시키려고 주제넘게 나섰다가 오해를 받았다. 두 사람은 서로 자기편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했다. 졸지에 박쥐 신세로 전락한 나는 선의가 매도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자존심도 상했다. 나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그냥 절연해버렸다. 돌아보면 철없는 시절이었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는 자존심은 얼마나 유치한 것인지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진정한 자존심이란 스스로가 감시자가 되어 자신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 안의 정직과 진실, 순결을 지키는 결의(決意)다. 나의 존재가치가 크고 자아개념이 긍정적일수록 타인의 시야나 잣대에 의미를 두지 않는 우아한 해탈(解脫)이다.
돈 10불을 돌려주고 나가는 남자. 중국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도 내 딸처럼 고귀하게 지키는 성(城)이 자기 안에 있는 걸까. 뒷모습이 참으로 견고하다.
<이 아침에> 미주중앙알보 6/30/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