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통신]미국 사람의 톨레랑스
앞집 백인 여자가 머리를 움켜쥐고 뒤로 넘어지는 시늉을 한다. “오, 마이 갓! 너도?” 이사 올 때부터 벼르고 별렀던 정원 공사를 곧 시작하기로 했기에 와인 한 병과 양해를 구하는 메시지의 카드를 내밀었다. 그녀의 반응이 짐작한대로다. 하기야 거의 2년에 걸쳐 집을 리모델링하는 옆집 때문에 시달렸는데 이제 또 우리 집에서 공사를 한다니 기절하는 흉내를 낼 만도 하다.
먼지와 소음은 물론, 도로를 점거한 인부들의 고물차와 크게 틀어둔 히스패닉 라디오 소리, 간이변소에서 풍기는 냄새. 매일 닦아내어도 시커멓게 묻어나오는 마룻바닥의 먼지 때와 풀장 바닥에 가라앉은 흙, 숨이 막혀도 문을 닫아두어야 했기에 옆집 공사 기간 내내 우리는 힘들었다. 사실 이번 주 들어 외장 페인트를 끝내고 모든 공사가 종료되는구나 싶은데 또 우리가 시작을 한다니 짜증이 날 일이었다. 헌데 웬걸, 여자가 환히 웃으며 도리어 나를 끌어안는다. 찾아와서 양해를 구해주니 오히려 고맙단다. 소음은 집안에 음악을 크게 틀어놓으면 되고 먼지는 문을 꽁꽁 닫아두면 된다며 2년 동안 시달린 끝에 얻은 지혜(?)도 가르쳐 준다. 집을 새로 지어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며 사람들은 툴툴거렸는데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는 표정이다. 우리 집 정원이 어떤 모양으로 변해서 동네를 더 멋지게 꾸며줄까 기대도 된다고 한다. 나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존중해주는 마음이 고맙다. 쿨(cool)한 그녀의 의식구조가 부럽고 존경스럽다. ‘톨레랑스’(Tolerance)라는 말이 생각난다. 나의 사고와 행동, 정치적이나 종교적인 신념이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의 그것을 먼저 인정하고 존중해주라는, 프랑스를 이끌어가는 이해와 관용의 정신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친구에 대해서 물어볼 때가 있었다. “아버지는 뭐 하신대?” “종교는 뭐니?” “그 애는 SAT 점수를 얼마 받았대?” 아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전혀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그걸 왜 알고 싶으냐며 이상한 엄마 취급을 했다. 친구는 친구로서만 존재하는 대상이지 어떤 환경이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무슨 옷을 입었든 어떤 습관이 있든 상관이 없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존중해 주는 미국문화인 줄 알면서도 나는 아이들의 반응에 섭섭해 했다.
지난 겨울 보스턴에서 LA로 오는 비행기를 탔다. 하필 그날은 미국인들에게 최고 인기스포츠인 슈퍼볼이 있는 날이었다. 게임은 휴스턴의 NRG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팀과 애틀랜타 팰컨스팀의 시합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내가 웅성거리는 소리로 복잡하더니 본격적인 시합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마구 터졌다. 그렇잖아도 LA까지 가는 다섯 시간이 참 괴롭겠구나 싶었는데 문제는 바로 내 뒤의 좌석에 앉은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단단히 의기투합하여 고함을 마구 지르며 경기를 즐겼다. 좌석을 발로 차는지 어쩌는지 내 몸도 함께 들썩거렸다. 비행기도 잘못 탔는데 자리까지 최악이었다. 승무원에게 뒷사람 때문에 못살겠다고 불평을 하고 싶지만 분위기상 그건 어려울 것 같았다. 둘러보니 앞의 작은 TV에서 인터넷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또 다른 사람은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컴퓨터나 책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한 사람 머리를 빼어 들고 소란스러운 사람을 째려보거나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엎치락뒤치락 드디어 패트리어츠팀이 팰컨스팀에 역전승 했다. 그 바람에 비행기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이파이브를 하고 맥주 캔을 서로 부딪치며 요란을 떨었다. 그러나 경기 관람을 하지 않는 사람은 요동조차 하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옆 사람을 전혀 개의치 않고 축제무드를 즐기는 사람의 안하무인도 놀라웠지만 조금의 내색 없이 그들의 소란을 묵묵히 견디는 인내심도 놀라웠다. 톨레랑스는 프랑스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인의 의식 속에도 톨레랑스 DNA는 자리 잡고 있었다. 톨레랑스, 그것은 너와 나의 다름을 서로 양보하며 타협하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다름을 수용하며 그 다름을 누리는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미가 없다고 흉을 보는 미국인의 ‘개인주의’는 결코 이기주의가 아닌, 타인을 인정하고 존중하여 자유를 주는 이해와 관용의 톨레랑스다.
먼지와 소음에 시달릴지라도 묵묵히 참아주는 앞집 여자 제시. 나는 이런 사람이 더불어 함께 사는 미국이 좋다. <대구일보> <세계문학> 2018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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