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 수의 / 이승준 - 제3회 신격호샤롯데문학상 수필 부문 대상
여름방학의 동네 뒷산은 초등학생 시절 내게 늘 탐험할 미지의 세계였다. 당시에는 곤충채집을 다니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신비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도심 속 야산 자락을 깎아내고 지은 곳이었는데 아파트 진입로 옆 계단을 올라가면 길도 없이 펼쳐진 잡목림으로 직결되어 있어 주변에 비해 자연환경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의외로 도시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은 크고 기묘한 벌레들을 많이 보았고 그런 경험은 지금껏 세상과 대상을 바라보는 내 시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곤충이 특히 번성하는 여름철, 내가 가장 많이 만난 곤충은 매미였다. 사실 사슴벌레나 장수풍뎅이 같은 멋진 갑충류를 가장 좋아했지만 개체도 드문 데다 야행성이고 서식하는 수목을 가리는 곤충이라 만나기가 아주 힘들었다. 하지만 매미는 덩치가 큰 데다 환한 대낮에 큰 소리로 시원하게 울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훨씬 쉽게 조우할 수 있다. 독이 있지도, 물지도 않고 멋진 소리로 우는 그 신비로운 곤충을 잡고 놔주고를 반복하며 유년의 나는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꿈을 키웠다. 매미의 가장 특이한 점은 허물을 벗는 형태로 우화를 한다는 것인데 모든 매미는 지상에서 하는 마지막 탈피를 통해 날개를 갖고, 날개 이전 생의 흔적을 온전한 모습 그대로 남겨두고 간다. 흙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살다 나무의 우듬지 어딘가에서 과거의 삶을 벗고 잠시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생. 그래서인지 사실 사람의 눈에는 매미보다 그의 허물이 훨씬 더 많이 눈에 띈다. 사람의 삶에서도 미래보다는 지나온 행적이 더 쉽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는 누렇게 바랜 과거들을 ‘허물’이라 부르며 생생하게 잊어간다.
좋은 글을 써 보려고 레지던스에 몇 개월 들어가 있었던 수년 전 여름, 나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뭔가를 쓰는 일과 밥을 하는 일 이외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낮에는 매미 울음소리를 듣는 즐거움으로, 밤에는 매미 허물을 모으러 다니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같이 있었던 다른 분들은 그런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매미의 허물은 살아 있는 벌레와 똑같이 생겨 다소 징그러울 수 있는 데다 어떤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몇 주 동안 밤 산책을 하며 그것들을 조금씩 모았고 유리병에 가득 채워 책상에 올려놓았다. 바깥으로부터 소나기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매미 울음들을 들으며 수십 개의 허물을 바라보면, 저 거대한 소리들이 모두 이 속으로부터 나왔다는 생각. 여름이 벗어두고 간 누런 수의(壽衣)들이 밤의 책상에 무더운 울음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것들은 인간의 밖에서 살아온 근원적 추억이었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시간의 일부 형태로서 거기 있었다. 매미를 잡아 놓으면 결국 죽음을 보지만 허물은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상한 위치에 있었으니 그것은 생명과 비생명을 둘로 나누는 우리의 구분에 생긴 작은 오류처럼 보였다. 그래서 당시 모은 허물들을 보며 나는 지금도 그때의 매미들을, 매미들의 시간을 추억하곤 한다. 생명의 부산물임에도 삶 쪽에도 죽음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 키틴질의 흔적은 어느 쪽 세계에 더 가까울까.
일본에서 우츠세미(空蟬)는 매미의 허물을 뜻한다. 그러나 이 말은 본래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 또는 ‘현세’를 가리키던 오래된 말이었고, 이후 매미의 빈 허물이라는 이미지와 겹치면서 덧없고 무상한 인간 존재의 의미까지 품게 되었다. 『겐지모노가타리』 제3첩의 제목이 「空蟬」인 것만 보아도 이 말이 얼마나 오랜 문학적 생명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그 말대로라면 우리의 온전한 모습 자체가 이미 하나의 빈껍데기라는 뜻도 될 텐데, 이는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오랜 종교적 내세관으로부터 나온 성찰의 결과일 것이다. 나는 그 말에서 인간사의 오욕칠정과 번뇌를 헛된 것으로 바라보는 오래된 무상관까지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종교적 관점이라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오랜 문학적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다는 건 얼마나 기묘하고도 낭만적인가.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승 따위의 이름으로 부를 순 있다 해도 저승 같은 것이 실재하는지는 알 리 없다. 생각이 우리에게 의미를 만들고, 그 의미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승이라 부르는 것이라면, 저승은 어쩌면 그 이름과 의미를 모두 벗어두고 날아간 뒤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어떤 형태이건 다행인 것은 이승보다는 저승이라는 개념이 완전한 자유에 훨씬 더 가까울 거라는 것. 한 번 우화한 매미가 옛날의 자신의 그림자를 떠나 다시는 나무 밑 어둠 속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더 큰 자유 쪽으로 우리를 보내기 위해 누런 수의를 입힌다. 그 새 옷은 우리가 저승이라 부르는 어떤 자유로부터 스스로 벗지 못한 삶의 마지막 허물로서 추억된다.
발인 날. 온 가족들이 함께 할아버지의 허물을 떠나보낼 때 나는 처음으로 사람에게 온전히 입혀진 수의를 보았다. 갓 허물 밖으로 나온 매미처럼 뽀얀 빛으로 누운 할아버지의 날개옷. 누렇고 고슬고슬하면서도 반듯하고 은은히 빛나는 그 옷은 옛날에 보았던 그 세대 사람들의 배냇저고리를 빼닮아 있었다. 질감도, 몸을 감싸는 방식도 이상하리만치 생의 첫 옷을 떠올리게 했다. 언젠가 삼베로 지은 배냇저고리에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부스럼 나지 말고, 가렵지 말고, 잘 참으라’는 의미를 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누가 처음 한 이야기인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하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수의를 바라보며 ‘이젠 부스럼 나실 일도, 병석에서 가려우실 일도 없으시니 편안해지시라’고 속으로 인사하기도 했다. 당신이 꿈에 딱 한 번 나오셨던 때도 그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웃고 계셨던 것을 생각하면 배냇저고리건 수의건 베옷은 시원하고 편안하기론 매한가지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매미의 허물을 바라보다 보면 누에나 나방이 벗어두고 간 고치를 떠올리게 된다. 요람과 고치에는 어딘가 유사한 점이 있다. 요람은 부모가 새끼, 혹은 알을 위해 만드는 것이고 고치는 곤충이 변태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만,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상을 열어주는 통로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배냇저고리는 이승에 온 사람이 처음 입는 옷, 수의는 이승을 떠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입는 옷이니 만사의 시작과 끝을 하나로 만들어주려는 노력이 비단 인간만의 것은 아닌 듯하다.
그 해는 유독 시끄럽고 커다란 말매미가 많은 여름이었고, 그 백색의 소음공해를 나는 오래 사랑했었다. 내 경험상 말매미와 참매미의 허물은 누렇고 엷은 광택을 띠는 갈색이었고 어릴 때 많이 보던 털매미 허물은 토기그릇처럼 온통 붉은 흙으로 덮여 있었다. 어느 것이건 백지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보면, 사람 수의의 주름 잡힌 그 느낌과 많이 닮아 있다. 허물의 이름으로 태어난 이의 허물, 떠나고 남은 허물을 위한 허물. 자신의 배냇저고리를 아직도 옷장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지인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나의 수의가 어떻게 입혀지면 좋을지 행복하게 상상해 보았다. 배냇저고리를 벗는 순간과 수의를 입는 순간 중 어느 쪽이 더 시작에 가까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태어난 이에게도, 아직 살아가는 이에게도, 허물을 벗은 이에게도 부스럼 없고 가려움 없이 오는 시간은 꽤 참기 좋은 삶일 거라고 여기면서, 나는 남은 여름을 누런 삼베 홑청과 함께 보냈다.
내게 배냇저고리를 보여주던 당신 덕에 할아버지의 수의를 더 깊이 만져보기도 하면서. 유년시절부터 검도를 수련하면서 이십여 년 동안 내 땀을 한 사발씩 받아 물이 다 빠진 도복 바지를 늘 똑바로 개어놓으면서. 복식 규정이 두 번이나 바뀌기 이전의 것을 오버로크만 떼어다 겨울 점퍼로 물려 입던 아버지의 옛 근무복을 다시 입어보기도 하면서. 더 예쁘게 보이려고 평소와 다른 화사한 치마를 입고 오던 어느 맑은 날의 당신이 있었음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태어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듯한데 벌써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선수처럼 수영하는 조카의 돌옷을 창고에서 찾았을 때, 이사를 다닐 때마다 엄마가 나와 누나의 옛 옷을 정리하며 하셨을 생각의 뒤를 밟아 보기도 한다. 중환자실 선풍기 바람 결에서 묵은 각질을 잔뜩 붙이고 있던 외할머니의 리넨 환자복을 떠올리기도 하고, 교통사고를 당해 몇 달을 누운 채 숟갈을 들다 뜨거운 죽을 흘리던 내 대학병원 수술바지를 생각하기도 한다. 당신의 옷이 내게 말해주는 것, 내 옷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세상엔 잊어야 버틸 수 있는 것과 잊지 말아야 더해질 수 있는 것이 있다. 사람에게 가장 오래, 가장 많이 밀착된 사물은 옷일 테고 그 옷이 의미와 언어의 일부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들은 나를 말하고 있고 내가 허물을 벗는 날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다시 매미 울음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여름. 올해도 말매미가 많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언젠가 이 중 하나가 내 수의가 될 거라는 재미난 상상을 해 보면서, 옷장을 정리하던 나는 나의 수많은 배냇저고리들을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