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의 찬 기운이 피부에 와닿는다. 몸이 자라 목처럼 움츠러드는데 화단 왼편에 우두커니 선 모과나무 한 그루가 나와 눈이 맞았다. 늘 그 곁을 지나다녔지만 죽은 듯 기척이 없던 나무다. 그런데 지금 자세히 보니 가지마다 톡 눈이 금붕어 눈알처럼 꽃눈과 잎눈들이 불거져 나온 게 아닌가. 무심코 지나칠 땐 보이지 않더니 관심을 가지니 비로소 눈에 띈다.
올망졸망 달라붙은 작은 생명의 움 돋움이 대견스럽다 못해 앙증맞기 이를 데 없다. 모든 생물들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나고 자라고 죽지만, 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만큼은 신비롭다 못해 경건해지기까지 하나 보다.
창문 밖 풍경이 화들짝 흔들린다. 풋나무 서리의 잔가지를 오르내리며 바쁜 움직이는 딱새들이다. 어림잡아도 서른 마리가 넘어 보인다. 등은 파랗고 가슴과 배는 노랗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작은 몸이 고무공처럼 통통 튄다.
새들의 다리엔 우리가 볼 수 없는 미세한 스프링이라도 장치되어 있는 걸까. 무엇을 찾고 있는지 작은 부리로 나뭇가지를 쪼기도 하고, 이 가지 저 가지로 건너뛰기도 한다. 짐작 같아선 벌레 같은 먹이를 찾겠지만 어찌 보면 먼 곳으로부터 몰로 온 봄을 숲마다 돌아다니며 퍼뜨리려는 익숙한 몸짓들 같아 보인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작은 새떼들은 양지에 앉아 계절 감각 없이 피고 지는 개나리꽃 가지와 함께 한동안 그렇게 출렁거린다.
새들은 나뭇가지라고 하기엔 너무도 연약한 잔가지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제멋대로 휘늘어진 가지가 '뚝' 하는 소리를 내며 부러지지나 않을까 조바심이 일었지만 작은 새들은 찾아든 그 숲에도 엄연한 질서가 있음을 알게 된다. 아무리 한 곳에 먹이가 많아도 새가 먼저 앉아 있는 가지에는 다른 새가 날아와 앉지 않는다. 일지일조一支一鳥다. 갑자기 날아든 새 무리로 인해 나뭇가지가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나의 조바심은 이내 사라진다. 그들은 철저하리만치 말 없는 숲속의 법칙을 지켜가고 있었다.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더 커 보이는 남의 떡을 차지하려고 탐욕스런 손을 내미는 인간들보다 저 작은 새들이 한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겨울 산행을 한다.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힘들다. 가파른 길로 접어들면 발이 미끄러워 등산로 양쪽에 곧게 뻗은 나뭇가지를 의지 삼아 붙들 때가 많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만은 아닌가 보다. 단단히 지탱해 주리라 믿었던 곧은 가지가 내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꺾여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을 사정없이 아래로 추락하게 만든다.
부나사리 없어 보이지만 떨어지면서 황급히 손에 감아쥔 칡넝쿨이 오히려 위태로웠던 몸을 앙버텨준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지푸라기에 목숨을 구한 격이라니.
등산을 물리치고 단학 수련을 시작하게 된 동기도 다른 운동보다 훨씬 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빠른 리듬에 몸동작은 맞춰야 하는 헬스나 에어로빅은 내게 맞지 않다. 천성이 느리고 무뎌 그저 몸이나 가볍게 푸는 운동이 알맞다. 눈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쉬워 보였는데 정해진 시간 동안 한 가지 동작으로 계속 버텨야 하는 것은 차라리 고문에 가까웠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를 느린 동작으로 나눠 오 분 동안 취하라니 이 무슨 해괴한 수련인가. 그래서 무슨 운동이 될까. 단숨에 해버리고 다음 동작에 들어가면 될 일을 왜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는지 초급 수련생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온몸의 기운을 단전에 모으고 호흡을 참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빠른 리듬에 정신없이 몸을 흔드는 에어로빅이 차라리 이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때마다, 나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그나마 미리 낸 회비가 아깝다는 생각에 울며 겨자 먹기로 수련을 계속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고통을 참으며 동작을 하나씩 배워가는 중에 내 몸과 마음은 몰라보게 나아져 가고 있었다. 허리디스크 때문에 일주일에 두세 번씩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해왔는데 단학을 하고 난 뒤로는 침술원이나 병원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척추를 곧추세우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근육 하나하나를 풀어주니 허리 통증도 가시고 몸은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듯했다.
신체 수련이 끝나면 명상의 시간이다. 그때 나는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된다. 새들이 내 몸에 둥지를 틀고 시원한 바람이 내 어깨를 쓰다듬는다. 잠시 쉬어감의 의미보다는 혼탁한 나의 혼을 맑게 씻어주는 자유롭고 경건한 세계로 인도하는 시간이다.
처음이 어렵다고 쉽게 포기했다면 이런 기쁨과 평화를 맛보긴 힘들었을 게다. 예전엔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빈자리가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염치불구하고 좁은 틈새라도 몸을 디밀곤 했다. 이제는 적어도 억지로 몸 끼워 넣기는 하지 않는다. 염력이 길러졌다고나 할까. 인내력이 깊어졌다고나 할까. 아니면 염치가 생겼다고나 할까. 부드러운 것이 결코 약하지 않았고 미세한 움직임이라고 콧방귀 뀌며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상큼한 바람이 코끝을 스민다. 날갯죽지 색깔이 엷은 갈색인 또 다른 딱새 무리들이 결혼식 날 신부가 던진 부케처럼 가볍게 숲속으로 떨어진다. 귀여운 부리엔 봄 엽서 한 장씩을 야무지게 물고 있다. 꽁꽁 언 겨울처럼 마음의 문을 닫아 두었다면 이런 조화 속 같은 봄을 어찌 훔쳐볼 수나 있었을까.
각자의 삶 속에 펼쳐진 행복의 총량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본다. 자신의 일상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행복의 지평을 향하여 얼마나 마음을 열어놓는가에 따라 행복지수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요즘 나는 내세울 일도 없이 부쩍 바쁘다. 큰 도움이나 못되겠지만 내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짬을 내어 찾아간다. 내가 베푼 조그만 봉사로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이 잠시라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무료했던 삶이 한결 풍요롭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계절은 저절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서 만들어 내는 것인가 보다. 내게 있어 인생의 봄날이란 바로 지금이 아닌가 한다.
봄에 보이는 작은 새들이 어쩌면 겨울 하늘을 받들고 서 있던 저 아름드리 나무의 빈 몸통에서 이제 막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한동안 새벽녘의 도깨비시장처럼 왁자지껄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풋나무 서리가 고요하다.
물어온 봄소식을 더 먼 곳에 전해주러 딱새 우체부들은 벌써 떠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