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어 아래 피는 꽃 / 김삼복
화암사 가는 길, 물길과 사람길이 나란히 정답다. 봄에 피는 얼레지나 볼까 하여 나선 길, 아직 때가 이른가 보다. 불심 깊은 골짜기에는 꽃 대신 나지막한 돌탑들이 돋아있다. 누군가 하나 둘 쌓은 것 위에 산 아래 감골 아낙이 자신의 소원을 슬며시 얹어 놓았을까. 돌탑들은 소원을 숨긴 채 수줍게 쌓여있다. 깊고 외진 산문 앞 돌무더기 그림자 안에 웅숭깊은 마음이 가득하다.
마음이 아파서도 특별히 빌 것이 있어서 온 건 아니다. 그러나 산사는 스스로를 부감시키는 마력이 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마음의 조망이 옮겨지고 자신의 짊어진 짐의 내력을 살핀다. 발걸음부터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터진 살갗으로 키가 자란 참나무와 속세의 먼지를 터는 산죽이 일주문을 대신하는 길목, 나무들이 봄물을 머금어서 굼실굼실 움마다 열망으로 도드라져 있다. 산길을 다 오르니 심연의 충돌들이 기운을 잃고 숨을 고른다. 적묵당에 앉아 풍경소리를 듣고 있으니 헝크러진 마음결이 제자리를 찾는다.
우화루 나무창으로 들어온 봄바람이 아직은 차갑다. 반듯한 사각천장에 파란 하늘이 팽팽하다. 이곳을 몇 번이나 왔을까. 마음은 너무나 여리고 예민하여 사각마당에 지는 그림자에서 비켜간 세월을 읽는다.
명승지 산사에는 크고 화려한 어고도 많은데 화암사 목어는 작고 소박하다. 비늘도 벗겨지고 색도 휘발되어 산산조각난 목어 한 마리. 지난겨울에는 백석의 명태처럼 꽁꽁 얼었다가 꼬리에 기다란 고드름도 달렸겠다. 서럽게 차갑고 파리한 목어는 여전히 처마밑 쇠고리에 묶여 속을 비운다. 제 속을 파내고 바람과 햇볕과 시간을 끌어 담았다. 그것들이 엉겨 붙은 뜨거운 속을 나무방망이로 두드려가며 첩첩산중에서 아직도 예불 중이다. 제 가슴을 울려 바다짐승들을 깨우는 소리는 계곡물 따라 강물 따라 어느 바다로 가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목어의 꿈을 싣고 가는 물길을 따라 사람들은 거꾸로 거슬러 왔다.
30년 만이다. 거슬러 온 시간들을 나는 놓아버렸던가 아님 놓쳤던가. 다시 대학 공부를 시작했다. 무슨 바람이 내 속에서 일어 이런 짓을 도모했는지 거슬러 온 나의 물길을 내려다본다. 이제 와 또 학인이 되겠다는 나의 의지의 원인이 어디서부터 불어왔는지 생각했다. 철 지난 외투의 구멍 난 주머니처럼 의미 있던 것들을 자꾸 흘려버려서 이제와 꿰매보겠다는 우격다짐인지도 모른다. “다 늙어서 웬 공부냐?”며 제대로 늦바람난 욕망이라고 친정언니는 지청구를 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새롭게 배운다는 것은 흥분되는 것이다. 반들거리는 전공서적을 나도 모르게 쓰다듬었다. 어쩌면 이런 떨림이, 두근거림이 남은 시간을 꽃피우게 할지도 모른다. 파냈던 살 한 점을 되찾은 듯하다.
자신의 꿈을 파내고 비우면서 마르고 비틀린 목어의 시간을 지나 배움의 열망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나이 든 문우들이 스쳐갔다. 내세울 것 없고 어느 누구와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삶이었다. 옹골진 불구 하나에 의지하며 두두둥 소리를 울리며 살아 나온 그들은 한결같이 따스하다. 파낸 속살들로 먹이고 키운 아들딸들은 하나 둘씩 자기의 물길을 따라 헤엄쳐 갔다. 사각천장에 갇혀 대웅전 햇볕이 그어놓은 그늘의 금을 세어갔던 목어의 시간은 어느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을까. 목어의 불경을 듣고 자란 산 아래 나무와 꽃들과 들짐승과 물고기를 생각했다. 눈과 비에 젖고 얼어 해쓱하게 늙었지만 못생긴 목어는 그래서 더 우직하다. 외갓집 같은 산사마당에 따스한 볕이 노랗다. 내려가는 산길 어딘가에 숨어 있을 꽃을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돌 위에 돌을, 마음 위에 마음 하나를 얹지 않고 사붓사붓 산길을 내려왔다. 돌이 자란 곳, 아니 마음이 쌓인 계곡 길을 내려오며 하심下心이니 무소유니하는 말들을 곱씹었다. 오늘도 우화루 밑에 걸린 목어는 깨끗이 속을 비워 바람과 볕에 제 빛깔을 내주지 않던가. 어차피 마음 비우기는 애당초 과분한 하문으로 남기고 산밑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였다.
새로 난 철계단을 뒤로하고 옛길로 내려섰다. 절벽 아래 너덜겅바위 옆을 지나는 순간, 드디어 보랏빛 치맛자락을 사뿐히 들어올린 꽃 한 송이가 보였다. 햇볕이 잘 들어 포실한 흙속에서 뽀얀 속살 내보이고 매초롬하게 고개 숙이고 있었다. 분명 목어가 목 터지게 불러낸 꽃이리라. 그래서 화암사 기슭에는 우직한 목어 옆에 역마살 낀 얼레지가 그리도 많았나 보다. 이제 목어 꼬리에 제 몸을 묶어두려는 발칙한 보랏빛들이 와앙 일어나겠지.
화암사 목어 아래 앙큼한 얼레지가 피었다. 그것이 제대로 바람났다는 풍문이 벌써 저잣거리에 파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