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속으로 들어간 새 / 이명길

 

천 년 비밀을 간직한 고분에 들어선다. 대낮의 햇빛 사이를 지나 고요가 칩거한 세상에는 먹빛을 풀어둔 듯 어스름하다. 안을 살피자 현세와 과거가 세월의 명암과 함께 내 몸을 감싸 안는다.

왕권에 힘쓴 자는 간 곳 없고 돌무지덧널무덤 안에는 껴묻거리가 보존되어 있다. 생활도구며 장신구와 전장품이 대부분이다. 모양이 온전한 것도 있지만 깨졌거나 조각으로 남은 것이 많다. 새의 날개를 단 금관이며 관모는 지배자의 권력이 다음 세상에도 이어진다고 알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쇠도끼나 화살촉이며 칼은 호위무사를 대신하는 듯하다.

 

말다래가 시선을 잡아당긴다. 장니라고도 하는데 말을 탄 사람의 옷에 진흙이 튀지 않게 배 양쪽으로 늘어뜨린 네모난 판이다. 여러 겹의 자작나무 껍질을 덧대어 만든 채화판에 그림이 남아있다. 바래지고 해졌으나 붉은 바탕에 그려진 흰 말은 금방이라도 흙먼지를 일으킬 듯하다. 갈기가 날리고 꼬리털이 뻗쳐져 바람에 날아오를 것도 같다. 뿔이 두 개 돋고 혀까지 길게 베문 머리는 신령스러운 기운마저 느끼게 한다. 자작나무와 백마가 서로에게 상생의 기를 넣어 타오른 불길이 은하수로 흐르지 않을까 싶다. 망자를 천상으로 인도하는 신성함을 장니 한 장에서 본다. 불멸을 꿈꾸는 천조天鳥처럼.

 

뒷산에 벌목작업으로 나무토막 몇 개가 버려져 있었다. 그중 하나에 눈길이 잡혔다. 잘린 모양이 반듯하고 크기가 아담하여 화분 받침대로 쓰면 좋을 것 같아 집으로 가져왔다. 와서 보니 아직 솔향이 묻어났다. 행여 갈라질까 봐 베란다 그늘에 두어 며칠 잊었는데 우연히 희끄무레한 형태를 보았다.

이리저리 돌려볼수록 나무토막에 희귀한 그림이 드러났다. 배었던 물기가 마르면서 문양을 갖추게 한 원인이 궁금했다. 매일 나무와 지내는 사람이라면 알 것 같아 전각 공예가에게 물어보고 목공소에도 가져갔다. 그중 한 사람이 촘촘히 새겨진 나이테 간격을 살피다가 방위인 듯 네 곳에 드러난 흔적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옹이 크기에 따라 얼룩 형상이 넓적하거나 뾰족해져 있었다. 그 그림은 흡사 새의 형상이었다.

 

푸드덕. 금방이라도 깃을 치며 날아오를 것 같은 새 한 마리가 나무속에 있었다. 작은 머리에 부리는 뾰족이 내밀고, 양쪽 날개는 수평으로 펼쳤다. 뻗친 꽁지깃에는 날고 싶은 수직상승의 의지가 가득 담겼다. 부리 아래쪽 나무 틈은 새가 세상과 소통하도록 약간 갈라져 있었다. 비상의 형상이 나를 끝없는 상상으로 이끌었다.

 

새는 어찌하여 나무속으로 들어갔단 말인가. 자유로운 비상을 즐기려면 온몸으로 대기의 중력에 저항하는 것이 특권이자 의무일 텐데. 충만한 자유를 나무속에 박아버린 동기는 무엇일까. 소나무와 함께 물아일체의 꿈을 꾸는가, 푸르디푸른 영원의 삶을 추구하는가. 누구를 용기로 위무하고 자신을 반성하며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 새의 비상이라면 나무의 몸짓은 깨어있는 삶이다. 무엇보다 공생의 삶이고 다음 세상으로 이어질 삶이기도 하다.

소나무인들 새를 수월하게 품을까. 불멸을 사모하는 새이므로 나무는 자신만의 은밀한 속마음을 새에게 보여주었다. 쉽게 들어간 것이 아니라 꿈으로 서로에게 어울린 인연이라 여겼다. 나무에 들어간 것이 새이지만 실은 나무가 새를 받아들였다. 받아들이고 들어가고, 포옹하고 갇히는 조탁의 인연이 있어 가능했다. 뿌리박고 사는 나무도 새를 품음으로써 날 수 있다는 희망을 원했으리라.

누구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 한다. 더러 상처를 받아도 새로운 꿈을 꾸며 살아간다. 꿈을 놓치지 않는 삶, 그건 천마의 갈기이며, 소나무의 솔잎이며, 새의 깃털이다. 천마가 하늘을 날아가는 것도 바람이 있어서이고, 소나무가 우듬지를 키우는 것도 바람의 흔들림이 있어서이고,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갯짓도 바람이 파동쳐야 가능하다. 뻗고 펼치고 날고자 하는 것은 바람이 있어야 산다. 살아간다.

 

삼남매의 막내로 응석만 부리다가 멋모르는 나이에 결혼했다. 시어머니가 안 계신 집안에 오남매의 맏이라는 현실이 내 안에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둘째 아이를 낳는 시점에 직장을 그만 두었다. 경쟁을 치러 들어간 직장이라 별일 없으면 정년이 보장되는데 막상 퇴직하자 꿈을 펼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게 가슴에 옹이로 남았다. 그 후 몇 번 날갯짓을 해봤으나 뜻대로 되질 않았다. 하지만 꿈은 계속되었다.

 

그 꿈을 문학으로 돌렸다. 나무속으로 들어가 백 년을 견뎌 문양을 얻는 새처럼 문학 속에서 깃을 펴고 싶었다. 당연히 어려움이 많았다. 비바람을 몇 번 맞았음에도 그것에 자리매김하려 했으므로 보잘것없는 재능을 탓할 수 없었다. 글의 소재는 발견하고 글싹을 찾지 못해 속눈물도 흘렸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 불안하여 허황한 꿈인가 포기하려고도 했다. 이 길이라 다잡았을 때는 달콤한 희열을 선사했다.

문학은 마침내 내게 새가 되었다. 영생불멸은 아니더라도 언제부터인가 나를 치유하는 긍정적인 길잡이가 되어 내 속에 숨은 것을 드러내도록 해 주었다. 나의 얼이자 삶인 글, 나의 육신과 영혼을 남기는 글, 그것이 내게는 비상하는 모양으로 남겨진 새의 자체이다. 종종 내 속에서 새 한 마리가 퍼덕이는 느낌을 받는다. 글을 쓰다 보면 세상을 입질하는 부리가 생기고, 날 수 있는 날개가 생기며, 만사를 품을 수 있는 깃털도 생긴다. 그렇게 성장하리라. 언젠가 완성된 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누군가의 가슴에 남을 것이다.

 

새는 긴 세월 나무와 함께했다. 신라 천 년의 천마도도 누구의 손에 발굴되어 비상하듯이…. 나무가 버려졌을 때는 아무도 새를 알아챌 수 없었다. 내가 주워 왔어도 내 문학의 시조새가 박혀 있음을 알지 못했다. 우리 집에 머물면서 보름간 눈길을 주고받는 동안 한지에 먹물이 번지듯 새의 문양으로 완성되었다. 무엇이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침이 되자 비몽사몽인지 거실에서 ‘퍼드덕’ 새소리가 들린다. 묵墨의 문양을 남겨둔 새가 창밖으로 날아간다. 내 안에 새 한 마리도 나래를 퍼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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