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담요 / 조이섭
시내에 따로 마련한 공부방에 들어서니 찬 기운이 엄습한다. 전기장판 스위치를 올리면 바닥이야 금방 따뜻해지지만, 밤새 냉골이었던 방 공기까지 데우려면 시간이 제법 걸린다. 이것저것 이리저리 정돈하고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는다.
아랫도리가 서늘하다. 올겨울 처음 입고 다니는 누빈 바지도 웃풍이 센 한옥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 곁에 있는 담요를 끌어당겨 덮는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도 무릎 담요가 필요한 나이가 되었다.
무릎이 따뜻해질라치면,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두 발이 시려 온다. 무릎과 발이 같은 온도일 때는 괜찮았다가 상대적으로 차갑게 느껴져서 그럴 것이다. 무릎 담요를 당겨 어깨까지 덮으면 발이 시리고, 발을 덮으면 어깨에 선듯한 기운이 얹힌다. 그러고 보니, 몸도 부위별로 평등을 요구하는가 보다.
발과 어깨는 조그만 담요 조각을 저 혼자 덮으려고 같은 몸이면서 남보다 더 심하게 다툰다. 발은 무릎을 구부려야 걸을 수 있고, 어깨를 흔들어야 균형을 잡고 넘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독거리며 살 궁리하기는커녕 발은 어깨가 없어졌으면 하고, 어깨는 발이 사라졌으면 한다. 발이든 어깨든 둘 중 하나가 없어지면 결국 그 본체인 몸이 죽고 만다. 이러한 사실을 엄연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다툼을 그치지 않는다.
한 몸인 무릎, 발과 어깨도 이런데 하물며 사람들이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세상의 모든 갈등은 이 간단한 일, 무릎 담요를 고르게 펴지 못해 일어난다. 국민의 시린 데를 다독거리겠다고 나서는 자는 이 점을 명심하지 않으면 또 다른 불만을 일으키는 실마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담요는 크거나 작아도 나름대로 쓸모가 따로 있다. 큰 것은 큰 대로 유용하고, 무릎 담요는 말 그대로 무릎을 가리는 데 알맞은 크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고, 쓸모가 다르다. 제 능력을 적재적소에서 마음껏 발휘하다 보면, 자신의 한계를 넘어 높은 경지까지 이르게 된다. 프랑스 교육자이자 계몽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도 그의 저서 『에밀』을 통해 말하기를,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자연 그대로인 본성을 해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도록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부모 마음은 그렇지 않다. 눈을 겨우 뜬 갓난아기에게 한글이나 알파벳 모빌을 들이댄다. 자녀의 소질이나 개성은 나 몰라라 하면서 덮어놓고 큰 담요로 만들려고 한다. 자연을 닮은 온전한 인간으로 키우기보다 오로지 공부 잘하는 아이를 만들려고 기를 쓴다. 그러자니 어른도 힘들고 아이도 힘들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정문 앞에 1학년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의대반을 모집한다는 현수막까지 등장할까.
어리석음은 어리석은 줄 모르는 자들이 저지르는 것이니 빠져나올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설사 어리석음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바꿀 용기가 없어 분란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정치, 경제가 그렇고 교육이 그렇다. 돈이면 이웃은 고사하고 부모 형제도 나 몰라라 한다. 조각보만 한 무릎 담요가 안분지족하고, 서로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고 아무리 가르치고 달래도 소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