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板門)을 바라보다 / 임경희 - 제6회 순수필 문학상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대문 앞에 선다. 빛바랜 문짝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저 낡은 표지를 넘기면 옛날이 어슴푸레 펼쳐질까? 판문을 밀자 책갈피 같은 어둠이 주춤거리며 뒤로 비켜난다.

아버지와 함께 찾은 재실(齋室)은 유난히 판문이 두껍다. 널빤지를 길게 켜서 옆으로 한 장씩 이어 붙인 문은 거칠면서 단단했다. 두께와 길이를 보면 여간 큰 나무가 아니었을 성싶다. 베어내 자르고 켜서 말린 다음 짜맞추기까지 얼마나 고단한 손길이 스며들었을까.

꺼칠한 턱수염에 너털웃음을 잘 짓는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일했다. 여섯 식구를 건사하기엔 늘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여간해선 힘든 내색을 짓지 않았다. 남의 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힘닿는 대로 도와주어 동네에서는 호인으로 소문났다.

볕에 찌든 얼굴이며 굳은살 박인 손은 도회지에 살던 다른 아이들 부모와는 구별이 되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이 없을 땐 어린 우리와 자주 놀아주었다. 함께 걷다가 오르막길이 나오면 업어준 적도 많았다. 넓고 딱딱한 등판에 얼굴을 묻으면 땀냄새며 거름 냄새가 났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선 원래 오랫동안 판문을 사용했다. 산이 많은 나라에 판재로 쓸 나무가 널려 있었기에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잡목 가지를 엮은 문보다 훨씬 튼튼하여 집안사람들에게 안정감도 줬을 것이다. 그러다 크고 작은 전쟁이 잇달아 일어나 산이 불타고 목재는 구하기 힘들 정도로 사라졌다. 판문이 흔치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무작정 고향을 떠나와 찬바람 드는 사글셋방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힘든 고비를 넘길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가 농사짓겠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었지만, 역시 만만찮았다. 직업이 없는 나날이 계속되던 중 어렵사리 부탁했던 데서 일자리가 비었다는 연락이 왔다.

기다림 끝에 얻은 직업은 도로와 인도를 청소하는 것이었다. 꼭두새벽, 물 한 잔만 마신 채 집을 나섰고 매연을 참으며 일했다. 늦은 오후에 피곤한 기색으로 퇴근하면 이내 목침을 베고 새우잠에 들었다. 우리가 떠드는 소리에 깰까 봐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동네 공터로 나갔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 등에 고생이 옹이처럼 박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재실 문에는 꽃무늬 쇠가 옆으로 줄을 이었고 문고리 하나가 달렸다. 크기에 비해 별다른 장식은 없다. 안쪽은 띠장을 네 군데나 가로질러 놓았고 빗장도 든든하게 걸려 있었다. 아무나 들이지는 않겠다는 완강함이 전해졌다. 지킴이 역할에 걸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난 이곳은 마을에서 재실로 쓴 강당의 아래채였다. 젊은 부부와 옹알이하는 아이가 함께 누웠을 방은 비좁아서 도리어 아늑했다. 여기서 살 적에 마냥 좋았다는 아버지 입매에 웃음이 떠올랐다. 땀 흘리며 메고 온 땔감으로 군불을 피우고, 배냇저고리 입은 첫애를 예뻐하며 바라봤을 젊은 아버지 모습이 그려진다. 부엌과 단칸방에 세상 추위가 들어오지 않도록 막아주는 판문이 있었기에 당신은 실낱같은 행복을 꿈꿀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집집이 내놓은 쓰레기를 거둬 정리하는 작업으로 바꾸었다. 손수레에 수북이 실어다 공터에 부려놓고 돈 될 만한 것들을 골랐다. 빈병, 폐지, 양은그릇, 전선에서 떼어낸 구리는 고물상에 팔았다. 쓸 만한 살림 도구는 집에 가져와 어느 정도 사용하다 버렸다. 날마다 새벽을 밀고 일터로 나가는 동안 어깨와 등은 조금씩 구부러지고 말라갔다.

판문은 철문처럼 듬직하지는 않다. 비라도 들이치면 훅 젖을 것이다. 그러나 단단함이 느껴진다. 투박하지만 따뜻하고 허름한 듯해도 강인하다. 문밖에서 세파가 몰아쳐도 방안에 있는 것들은 온몸으로 지켜내겠다는 의지도 엿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 가정을 보존하겠냐며 넌지시 귀엣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당신은 힘에 부치는 일을 하면서도 가난한 살림을 일구고 우리를 공부시켰다. 그런 중에도 어린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여름이면 됫박 얼음을 사와 대바늘로 쪼갰다. 그 덕에 수박이나 미숫가루를 먹을 때는 입이 얼얼하고 땀이 식었다. 생일에는 평소에 꿈도 못 꿨던 자장면과 용돈을 선물했으며 겨울에는 가끔 귀한 귤도 손수 사 들고 귀가했다.

아버지 인생이 가족을 든든하게 지키는 내내 우리는 저마다 다른 결을 새기며 자랐다. 공부 잘했던 나, 찌개 하나라도 맛깔스럽게 끓여내고 운동을 잘했던 첫째 여동생, 남달리 예쁜 막내가 그랬다. 남동생도 건강하게 성장해서 사회의 일원으로 한몫했다. 밋밋했던 아버지의 문은 우리가 품었던 나이테가 조금씩 도드라지자 차츰 멋있어졌다.

튀니지엔 나무문을 가진 집들이 마을을 이룬 도시가 있다. 지중해를 바라보는 파란색 문에는 쇠 장식이 박혔다. 우리나라 판문에 있는 작은 쇠붙이와도 닮았다. 구레나룻을 기른 한 남자가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카메라 앵글에 잡힌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따뜻하고 인정스러운 눈빛이 표정에 담겨 있어서다.

재실을 휘돌아 나오며 밖을 봤다. 길은 건넛마을로도 뒷산으로도 연달아 이어진다. 인적 드문 추운 날이다. 소나무 사이로 새들이 날아가고 나무문의 삐걱거리던 소리도 잦아든다. 날마다 세상 쪽으로 난 문을 밀며 아버지는 그렇게 일터로 나갔을 것이다. 곤하게 자는 어린것들을 그윽이 바라보며.

아버지가 저만치 앞에서 걷는다. 굽은 판문의 어깨에 남은 저녁볕이 따습게 얹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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