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와 꼴뚜기 / 정진권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키고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한다. 어쩌면 두 놈이 다 그리도 못생겼을까? 하지만 나는 모과가 정답고 꼴뚜기가 정답다. 이것은 꼭 내가 모과나 꼴뚜기처럼 그렇게 못생겨서만은 아니다.​

 

나는 지금 책상 위에다 모과 한 알을 놓고 본다. 어느새 그 세련되지 못한 얼굴에 정이 들었다. 울퉁불퉁 아무렇게나 생긴 그 모양은 우리 고향의 김서방이나 이서방처럼 순박하기만 하다. 모과의 얼굴에 멍이 하나 들어 있다. 하지만 이것도 싸움하다 든 멍이 아니라 물꼬 보러 가다가 발을 헛디뎌서 생긴 멍이다.​

 

모과알의 그 노오란 빛깔도 야하지 않아서 좋다. 그것은 화려한 빛이 아니라 은은한 빛이다. 도도한 빛깔이 아니라 겸허한 빛깔이다. 꾸며 내는 빛깔이 아니라 천성에 순하는 빛깔이다. 조용히 며칠을 두고 보노라면 그 빛깔 위에 윤기가 돈다. 조금도 찬란하지 않게 흐르는 그 윤에는 그윽한 정이 있다.​

 

나는 이따금 모과를 두고 그 향기를 맡아 본다. 그것도 그 모양처럼 순박하고 그 빛깔처럼 겸허하다.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가슴 속 깊이 들어오고. 독하지 않으면서도 오래 남는 향기다. 그것은 아파트가 아니라 초가 삼칸의 아미지다. 기발한 신서新書가 아니라 고전古典에서 맡는 향기다. 천재가 뿜어내는 향기가 아니라 성자가 그윽히 풍기는 향기이다. 나는 나의 인격에 모과 향기가 배길 바란 일이 있다. 그러나 너무 외람스러워서 그만두었다.​

 

나는 금년에도 모과주를 좀 담글까 한다. 모과주는 우선 그 빛깔이 좋다. 노오란 데다 차츰 발그레한 빛이 돌 무렵이면 여간 고운 게 아니다. 그것은 귀족적인 빛이다. 모과주는 그 향기도 좋다. 맛도 산뜻하다.​

 

순박하고 겸허한 속에 귀족적인 품위를 간직한 것, 고전적인 품안에 산뜻한 맛을 품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모과일까 한다.

꼴뚜기란 놈을 들여다보면 우선 측은한 생각부터 든다. 못생긴 것은 그만두고라도 어쩌면 그리도 잔망스럽게 생겼을까? 문어처럼 의젓하지도 못하고 낙지처럼 당차지도 못하고 다만 잔망스러울 뿐이다.​

 

“얘 이 못생긴 녀석아, 세상엔 무엇하러 태어났니?”​

 

생김새만 가지고 세상을 사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나는 꼴뚜기를 볼 때마다 이런 말이 입 속에 맴돈다. 그러고 보면 ‘꼴뚜기’라는 말의 어감마저도 넉넉한 데가 없다.​

 

꼴뚜기는 그 빛깔도 칙칙하기만 하다. 은은하지 못하고 산뜻하지도 못하다. 차라리 강렬하여 자극적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칙칙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특징도 없는 빛깔이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역겨운 빛깔이다.

 

국어사전을 펼쳐 보면 ‘꼴뚜기 장수’와 ‘꼴뚜기질’ 이란 단어를 찾아볼 수 있다. ‘꼴뚜기 장수’는 ‘꼴뚜기 파는 사람’ 이외에  ‘많은 밑천을 다 없애고 구차하게 사는 것을 욕으로 이르는 말’이란 풀이가 있고 ‘꼴뚜기질’은  ‘손가락을 꼬부려 산자山字 같이 하여 욕하는 짓’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어느쪽을 보거나 점잖은 뜻이 못 된다. 하필이면 저의 이름이 들어감으로써 남을 망치거나 욕이 되는 삶을 타고 난 것일까? 가엾은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꼴뚜기에게도 한 가지 덕은 있다. 나는 꼴뚜기를 좋아한다. 그 못한 꼴뚜기의 어느 구석에 그처럼 희한한 맛이 숨어 있을까? 매우면서도 고추맛이 아니고 짜면서도 소금맛이 아닌, 그 맛은 의젓한 문어도 낼 수 없고 당찬 낙지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아, 우리 못난 꼴뚜기가 그래도 쓸 데가 있어”​

 

나는 꼴뚜기젓 한 점을 밥에 놓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린 일이 있다.

 

나의 선배인 A선생은 모과 같은 분이다. 나는 이 분의 순박함을 촌스러운 것으로 보고 이분의 겸허함을 못난 것으로 보아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이분의 저 아래 까마득히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나고 놀란 일이 있다. 그때 나는 내가 한 마리 꼴뚜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생각도 별로 개운치가 않다. 나에게 무슨 ‘그래도 쓸 데가 있는 한 군데’가 있을까?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