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단어를, 문장이 문장을 부르니…일단 쓰세요

 
[한겨레S] 손소영의 짧은 글의 힘
백지 앞에서
완벽한 첫 줄에 집착 말고
이것저것 끄적이고 다듬기
몸 움직이면 두뇌 자극·환기
쓰다 막혔을 때 산책도 좋아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밀밭에서 본 아를’(1888). 위키피디아

급하게 처리할 일들이 쌓여 있거나 도저히 짬이 나지 않을 때 유독 기발한 아이디어와 쓰고 싶은 것들이 이것저것 떠오릅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주말에는… 이번 휴가 때는…’ 이렇게 약간은 벅찬 마음으로 미뤄두죠. 그런데 막상 주말이나 휴가를 맞아 제대로 마음 잡고 차분히 책상에 앉으면 모니터 화면에 커서만 깜빡거리고 백지와 싸우게 되는 때가 많습니다.

강의를 하면서 글쓰기 과제 마감일을 언제로 하면 좋겠냐고 물으면 대부분 주말을 얘기합니다. 하지만 결국 평일 점심시간이나 밤 시간에 제출할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오히려 회사 일을 하면서 짬짬이, 아니면 회사 일을 마치고 퇴근한 뒤에 글이 더 잘 써지기 때문입니다. 주말이나 쉬는 날에 글이 잘 써질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그날이 되면 왠지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몸까지 나른해지죠. 특히 기한이 정해져 있고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증상은 더 심해집니다. 어떻게든 뭔가를 생각해보려고 컴퓨터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깜빡거리는 커서마저도 나를 압박하는 것 같아 조바심은 더 나고 그럴수록 더 눈앞이 하얘지기만 하는 경험을 다들 한번씩은 해보셨을 겁니다.

여백의 공포 극복하기

이럴 때는 일단 백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도저히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여백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쓰는 것밖에 없습니다. 시의 첫 행은 신의 선물이라고들 하듯이 처음부터 완벽한 첫 줄을 쓰려고 하지 말고 그저 이것저것 끄적여보세요. 완성된 첫 문장은 제일 마지막에 써넣을 때도 있습니다. 언젠가 너무 글이 안 써져서 첫 페이지 맨 꼭대기에 “라라라…”를 계속 반복적으로 쓰기 시작한 적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몸이 풀리면서 머리도 가벼워졌고, 결국 글에 속도가 붙으면서 끝까지 써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처음에는 내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차가 지나간다. 구름이 흘러간다”처럼 보이는 걸 그대로 쓰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뭔가를 또 생각해내거나 내 감정을 느끼려고 하다 보면 다시 막막한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먼저 써놓을 수도 있습니다. 가끔 처음 시작과 끝 마무리는 기가 막힌 게 떠올랐는데 나머지 부분이 빈칸으로 남아서 그 두 문장마저 포기할 때가 있으니까요. 띄엄띄엄 생각나는 것들만 먼저 적어놔도 상관없습니다. 지금은 엉망진창인 글로 보이더라도, 제대로 된 문장이 아니어도, 일단 쓰기 시작하는 겁니다. 나중에 계속 다듬어가면 됩니다. 정리된 내용이어야 적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세요. 쓰다 보면 정리되는 때가 더 많습니다.

부담없이 막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놓는 것도 좋습니다. 저는 그래서 항상 노트북 옆에 아무렇게나 마구 끄적일 수 있는 종이를 준비해둡니다. 백지와 싸우기 위해서 백지를 여러 장 갖다놓는 셈입니다. 신기하게도 어차피 버릴 종이라고 생각하면서 휘갈겨 쓰면 쉽게 뭔가를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기 위한 시동을 거는 출발점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지난 연재에서 마중물 얘기를 했는데 생각이 생각을 불러오듯 글이 글을 부릅니다. 단어가 단어를 부르고 문장이 문장을 부르는 선순환이 시작됩니다. 자신만의 출발점, 마중물이 되는 뭔가를 만들어놓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슬렁거림의 미덕

몸을 움직여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모든 걸 집중해서 붙잡고 있을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나다가 잠시 화장실에 가거나 샤워를 하다 보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종종 있죠. 청소나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바빠지면 반대로 머리가 단순해집니다. 몸을 규칙적으로 움직일 때는 마음이 안정되고요. 복잡했던 머리가 가벼워지면 불편했던 마음도 잠잠해지는 걸 느낍니다. 그래서 몸이 바쁠 때는 행동을 잠시 멈추고, 머리와 마음이 부산스러울 때는 몸을 더 바쁘게 움직이라고 합니다. 긴장되는 강연 전에 춤을 춤으로써 불안을 열정으로 바꾼다는 미국의 건강심리학자 켈리 맥고니걸의 인터뷰가 기억납니다. 감정이 격해졌을 때 걷다 보면 흥분이 가라앉는 것도 비슷한 효과일 겁니다. 작가나 철학가들이 산책을 즐겼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매일 산책을 하는 편인데, 독감 때문에 밖에 못 나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0일 만에 나와 보니 평소 지나치던 산책길이었는데 보이는 풍경들이 다르게 느껴지고 새들의 지저귐도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같았는데 시간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들이 있고,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볼 수 있는 경치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풍경, 그리고 걸으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들이 다 다른 것 같습니다. 눈길을 주는 것만 눈에 들어오고, 머릿속에 있는 것에만 눈길을 주게 되는 법인가 봅니다.

프랑스 파리의 산책자를 이르는 ‘플라뇌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 말로 ‘만보객’(漫步客)이라고 표현하는데, 파리를 천천히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녀야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합니다. 산책이 생각을 환기시키고 두뇌를 자극하는 면도 있지만 느긋하게 걷다가 만나게 되는 보도블록 틈에 피어난 민들레,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나뭇잎, 제 몸의 세배나 큰 먹잇감을 열심히 옮기는 개미 같은 것들이 눈으로 마음으로 스며들어 글을 쓰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흐가 파리의 만보객으로 지내면서 그린 작품을 봤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닌, 사람이나 사물과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화가의 시선이 그림에 나타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조급함을 버리고 오늘 하루는 하나의 문장만 쓴다는 생각으로 차곡차곡 꾸준히 쌓아간다면 백지와의 싸움에서도, 슬럼프에서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을 쓰면서 몸과 마음은 이어져 있다는 걸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글쓰기가 몸과 마음을 연결시켜주기도 합니다.

방송작가

물리학을 전공한 언론학 석사. 여러 방송사에서 예능부터 다큐까지 다양한 장르의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짧은 글의 힘’, ‘웹 콘텐츠 제작’ 등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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