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非文)에 관하여
임병식 rbs1144@daum.net
요즘 지면에 발표한 글이나 보내온 수필집을 보면 어떤 현상이 두드러진다. 무엇이냐 하면 주어를 거의 생략하고 시제(時制)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현상이 보편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을 두고 시류와 경향이 그러하니 눈감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 볼 점이 있지 않나 한다. 작품을 읽어가며 작품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불분명하면 혼란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글의 초점이 흐려지고,시제가 무너지면 시간개념이 모호해져 글이 뒤죽박죽으로 읽히게 된다.
어떤 글은 작품 속에서 특정 행위자의 행동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주어'는 빠져있다. 이런 글을 대하면 혼란을 겪는다. 이렇듯 한 번도 주어가 나타나지 않는 글이 더러 있다. 이런 글을 만나면 주인공이 글을 쓴 필자인지, 아버지인지, 삼촌인지 알 길이 없다.
물론 제목 밑에 ‘아무개’라는 이름이 명기 되어 있으니 짐작은 가지만 말이다. 그리고 독자도 필자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가 갸웃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것도 문제인데, 그 보다 좀 더 심각한 것이 있다. 바로 시제를 무너뜨리는 글을 대할 때이다. 작가의 인격을 감안해서 여기서는 변용을 하지만 이런 것을 보는경우이다. “지난해 봄이다.” “몇 달 전 고향 시골집을 갔을 때였다. 마당에 들어서니 기분이 좋아진다.”
과거형과 현재형을 뒤섞어 쓰고 있다. 이것은 시제를 오용한 것으로 잘못된 비문이다. 첫 번째 문장을 보자. ‘지난해’라는 과거와 ‘봄이다’라는 현재를 결합하여 시제의 무력화시키고 있다. 두 번째 문장 역시도 과거의 상황을 갑자기 현재형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해서 문장이 상호 조응이 되지 않고 어색하다. 이 역시 명백한 비문이다.
첫번째 문장은 마땅히 “지난해 봄이었다.”로 바뀌어야한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도 “마당에 들어서니 기분이 좋았다.” 혹은 “기분이 좋아졌다.”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문법상 어법에 맞고 바른 말이 된다.
지적한 표현법은 이즘 하나의 유행으로 보이는데, 고쳐져야 한다고 본다. 그런 오류는 비교적 생각이 자유로운 시나, 운문쓰기의 글이 확대된 측면이 없지 않아 보이는데 유의해야 한다.
아마도 그런 글쓰기를 선호한 사람은 문장의 탄력성을 염두에 둔 나머지 글이 쳐지지 않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산문인 수필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며 용인이 되지도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주어의 표기 내지는 노출’에 대해서 필자가 주장하는 견해는, 그동안은 고집스럽게 세단원의 문장 내에서 밝혀야 한다고 것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다소 완화하여 전체의 글을 읽었을 때 굳이 ‘나’,또는 ’나는‘ 이라고 것을 글 속에서 밝히지 않더라도 읽고 나서 그가 누구인지 드러내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시제문제인데, 이것은 하나의 예시로써 차의 운행의 법칙을 들고 싶다. 글쓰기에서는 ‘이렇다’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으나 견해에 참고가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운전자가 차선을 바꾸어 다른 차선으로 들어가고자 할 때는 ‘깜빡이’를 켜는 것이 법칙이다. 이는 뒤따르는 차가 놀라지 않도록 예고적으로 알려주는 신호임과 동시에 뒤따르는 운전자가 그것을 보고 속도를 늦추거나 심적으로 대비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도 그렇게 함으로써 뒤에 오는 운전자는 대비를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글쓰기에서 시제를 바꿀 때는 자기 흥취에만 취해있을 것이 아니다. 글을 따라 읽는 독자에게 예고적으로 알일 필요가 있다. 감정의 유로가 자연스럽게 흘러서 받아들이게 해야한다.
따라서 마음대로 급 변경을 할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갈 때는 자동차 기아의 변속의 조치처럼 생각의 흐름이 무리없이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예시의 문장은 어떤가. “ 몇 달 전 시골 고향집을 갔을 때였다. 마당에 들어서니 기분이 좋아진다.” 많이 어색하다. 문장에 있어서 시제는 중요하다. 가령, "철수가 나무에 올라갔다. 나는 그 밑에서 떨어진 감을 줍는다." 이렇듯 시제에 별 차이가 나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신중해야 한다.
뚜렷하게 시차가 날 때는 중간에 징검다리로서 거치는 장치가 필요하다. “몇 달 전 시골 고향집에 갔을 때였다. 화창한 날씨 탓일까. 마당에 들어서니 기분이 상쾌하다.” 이렇듯 무리없이 받아들일 예고장치가 요구된다.
그 에고장치는 의문형도 좋고, 명사형도 무방할 것이다. 한편, 굳이 과거형을 현재형으로 돌릴 때는, 예외가 있다. 많은 과거형을 언급할 경우, 그중의 하나를 특별히 부각시킬 필요가 있을 때, 먼 곳을 찍은 어느 광경을 크로즈업 할 때처럼 과감하게 현재형으로 돌릴 수 있다고 본다. 하나의 표현 기법으로 용인이 되는 부분이다.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제를 마음대로 바꾸어서는 아니 된다.
비문은 문장의 조응관계가 맞지 않는 것도 해당하지만, 이렇듯 시제가 뒤죽박죽 엉키는 것도 문제가 된다. 어제는 등단한지가 비교적 얼마 되지 않는 분이 보내온 책을 읽다가 눈에 거슬린 부분이 있어 전화를 넣었다.
시제의 무시가 지나쳤던 것이다. 그 버릇이 굳어지기 전에 고쳐주면 좋을 듯해서 일러주게 되었다. 내말을 듣고서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쓴 약이 되었으면 해서였다. 굳이 그렇게 까지 한 것은 글쓰기에서 비문을 바로잡은것이 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