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죽나무 경전 / 최장순
쪽동백과 4촌쯤 되는 사이란다. 그러나 꽃차례나 잎사귀의 크기로 때죽과 쪽동백을 구별한다. 시제時祭참석차 고향에 내려갔다가 들른 대관령 기슭의 솔향수목원. 싱싱한 금강송 내음에 취한 산책길에서 꽃송이 가득 매달고 있는 몇 그루 때죽나무를 만난 것은 보너스였다.
‘눈종’snowbell이라 불리기도 한다. 정말 하얀 종처럼 생겼다. 누구는 활짝 펼친 꽃무늬 양산 같다고 했지만, 나는 앙증맞은 꽃과 열매가 사랑하는 이의 귀에 매달렸다는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 아래를 향한 꽃들이 엎어진 사기 종지 같기도 하다. 향기로운 소리가 쏟아질 것 같다. 봄과 여름 사이, 숲 냄새를 맡으며 나는 때죽나무를 ‘귀 많은 나무’라 부르기로 한다. 귀가 많다는 것은 남의 소리를 잘 듣는다는 것. 위를 향한 귀가 아니라 아래로 열어놓고 있는 귀들이다.
올려다보는 시선에 숲은 원형의 파장으로 화답한다. 사뿐 내려와 말똥히 앉아 있거나 어린 게처럼 슬쩍 옆걸음을 치기도 하는 소리. 하지만 소리만 내려 보낼 수 없다고 꽃들은 호시탐탐 땅으로 뛰어내릴 기회를 엿보고 있다. 넉넉한 품에 있을 때가 좋은 줄 모르고 사춘기 호기심을 발동하는 것이다. 위험이 없으면 도전도 없지, 싱싱한 모습 그대로 맨발로 뛰어내린 꽃들이 신발을 챙겨 신고 봄의 모퉁이를 돌아나가기도 한다.
맘에 드는 처녀에게 휘파람을 불며 슬슬 작업 반경을 좁혀가듯, 봄바람에 발동한 끼가 나무를 슬쩍슬쩍 흔들어본다. 물오른 계절, 반응은 즉각 전달된다. 나무가 허공을 선회하는 아찔함까지 듣는지 공중에 세운 수많은 안테나. 귓문을 열어젖힌 초여름이 조롱조롱 흔들린다. 종소리 한 무리를 바닥에 부려놓는다.
이름의 유래가 많은 때죽이다. 나뭇가지에 때가 묻은 듯 거무죽죽하다고, 스님의 민머리 같은 열매가 떼로 달린다고, 독이 있는 열매를 짓이겨 물에 풀면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다고 해서 붙인 이름들. 실제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열매를 찧어 화약에 섞어 총알로 사용했다는 일화가 있다. 어느 설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나무를 올려다보면 떼로 달라붙는 하얀 느낌이 있다. 그늘을 깔고 앉으면 삽상한 바람이 불 때마다 달콤한 수피향과 꽃의 레몬향이 내 마른 귀를 촉촉하게 적셔준다. 두 귀가 환하게 열린다.
“달콤한 말만 듣지 마라, 귀는 열고 입은 닫아야지.”
나무가 말씀을 떼로 내려 보낸다. 그동안 귀보다 입을 자주 열었다. 소통의 불균형, 경청은 상대의 말에 대한 수긍이자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옳다고 목청을 높였다. 나무의 말처럼 입 대신 닫은 귀를 열면 갇힌 마음까지 다 들을 수 있을까. 무심코 내뱉는 말 때문에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말이 어느 가슴에 치명적인 독이 되지는 않았을까.
어느 날 꽃들이 나무를 떠나면, 나무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열매를 찾아 매달 것이다. 조개가 진주를 키우듯 뿌리에서 길어 올린 양분으로 키우는 귀고리. 눈곱 크기에서 점점 콩알만큼, 그리고 회녹색 진주가 될 때까지 나무는 끊임없이 여름을 채울 것이다. 귀가 막히지 않도록 수시로 바람을 불러 귀를 씻을 것이다. 세상의 잡소리에 막힌 내 귀를 씻어내듯.
구월이면 때죽을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곤줄박이다. 미식가인 곤줄박이는 지난해 먹어본 열매 맛을 잊지 못하고, 나무는 기꺼이 그를 위해 성찬을 내놓는다. 그렇다고 거저먹을 곤줄박이가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밥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잘 익은 노래 몇 소절을 답례로 내준다. 목청 고운 노랫소리에 나무는 기쁨에 겨워 몸을 흔든다. 그늘에 들어 구월을 느껴보고자 한다면, 곤줄박이의 노래는 기분 좋은 덤이다.
겨울은 인내의 계절, 살을 에는 추위에 제 몸의 귀들이 얼까 노심초사하는 때죽. 마른 손들을 뻗어 귀를 데워보지만, 그 많은 귀를 어찌 다 데울 수 있을까. 그러다 생각해낸 묘안이 발치에 귀를 묻어두는 것. 만추의 쓸쓸함을 접어둔 채 제 귀들을 모두 떼어낸다. 몸에서 하나둘 분리된 귀들을 제 뿌리 깊숙이 묻어둔 뒤에야 후우, 안심을 내뱉는 때죽은 이른 봄까지 너끈히 추위를 견뎌낸다.
귀가 없다고, 더 이상 말을 들을 수 없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마침내 봄, 나무 밑동의 비밀 서랍을 열면 뿌리에 길을 튼 수많은 귀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구름이 햇솜으로 이불 한 채 꾸밀 때쯤 햇살돋보기를 코에 걸친 나무는 다시 귀들을 가지로 불러올릴 것이다.
나무가 쫑긋 귀를 세운 채 내려다본다. 잠시 자연과 한 몸이 된 나도 세상을 향해 두 귀를 열어둔다. 소리는 언어이자 느낌이다. 때죽을 오래도록 올려다본다. 깊은 산중에서 만난 진언眞言, 경전의 말씀이 쏟아진다.
“네 안의 말까지 귀담아들을 거야.”
< 에세이포레 2021.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