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이상의 말, 글 이상의 글 / 김정화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최승자 역∣ 까치∣ 2001.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봄의 어느 아침, 꽃들을 가득 달고 벚나무가 서 있다. 하얀 꽃들은 그 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나온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그 꽃들은 침묵을 따라서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래서 하얀 빛이 되었다. 새들이 그 나무에서 노래했다. 마치 침묵이 그 마지막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쳐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 침묵의 음音들을 쪼아올리는 것이 새들의 노래인 것 같았다.
- <시간과 침묵> 일부
봄이 깨어난다. 부푼 벚나무 가지 사이로 햇살이 튀고 흙바람이 구른다. 단단하던 땅도 품을 열어 햇풀을 받아들인다. 이 거룩한 봄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글 쓰는 이들은 저마다 봄의 근원을 찾으려 눈 뜨고 귀 기울인다. 좀개구리밥의 겨울눈과 봄까치꽃의 푸른 꽃불 곁을 살피고, 갈대청 부딪는 기척이나 강물 풀리는 소리 곁으로 다가선다. 그러나 다 틀렸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이 계절의 변화를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상상해보라, 나무가 꽃을 해산하기까지 그 결박의 시간을. 침묵이 봄을 키워냈으니 침묵의 체에서 봄꽃들이 켜켜이 떨어져나온 것은 자명한 일. 그래서 생명을 터트린 어미 나무를 위해서 새들도 침묵의 음音들을 쪼아올리어 비로소 노래하는 것이다.
내게 봄에 관한 최고의 문장을 꼽으라고 하면 한 치의 주저 없이 피카르트의 글이라고 답한다. 감히 단언컨대 지금까지 ‘침묵의 봄’만큼 가슴 뛰게 한 표현은 없었다. ≪침묵의 세계≫를 읽다 보면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경구이며 잠언이다. 경망스럽던 마음도 바삭 당겨지고, 싱겁던 일상도 굳건히 세워 올리게 되어 삶이 무량하게 경건해진다.
침묵은 실로 위대하다. 그의 말대로 침묵이 계절을 탄생시키고, 침묵이 인간을 관찰하며, 침묵이 말을 완성시킨다. 피카르트의 침묵을 처음 대하는 독자는 그가 침묵에 대해서만 오롯이 찬양하리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이 말을 하지 않고 사는 일은 견디기 어렵다. 그러므로 침묵이 말에서 분해되지 않았으며 말과 대립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밝힌다. 말과 침묵은 서로 독립되었으며 다시 일체를 이룬다. 나아가 침묵은 말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형성하지만, 오히려 말이 진정한 인간을 만든다는 점을 언급한다. 다만 강요된 침묵이 아닌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침묵이어야 하며 정신과 결합시킬 수 있을 때 빛이 나게 되는 법. 대상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것이 침묵의 힘임을 강조한다.
말의 세계는 침묵의 세계 위에 세워져 있다. 말이 마음 놓고 문장들과 사상 속에서 멀리까지 움직여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밑에 드넓은 침묵이 펼쳐져 있을 때뿐이다. 그 드넓은 침묵에게서 말은 자신이 드넓어지는 법을 배운다. 침묵은 말에게는 줄 타는 광대 밑에 펼쳐져 있는 그물과도 같다.
- <말 속의 침묵> 일부
말의 세계가 허공의 세계라면 침묵의 세계는 바닥이 된다. 허공을 잡는 어름사니를 위해 그물망이 발아래 드리워진다면 헛발을 짚더라도 외줄 인생이 좀 더 든든해질 수 있겠다. 말의 배경이 침묵이 된다는 것을 기억할 일이다. 그러니 언어에서 침묵을 상실한다면 얼마나 교만하고 불손하며 무질서한 소음이 될까.
때때로 침묵이 하루의 전부가 되는 날도 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말을 했던가. 침묵 속에서 사랑이 가장 멀리까지 뻗어나갈 수 있다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침묵할 때에 사랑하기가 훨씬 더 쉽다.”고 한 피카르트를 먼저 읽었더라면 나의 젊었던 사랑도 성공할 수 있었을까. 경솔한 입말로 상대를 찌르거나 왜곡된 언어로 경계 짓지 않았을는지도 모르겠다. 활을 너무 세게 당기면 부러지듯이 말의 속도도 침묵을 곁들여 조절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난날들은 흘러갔고 이제는 내가 쓰는 문장에 침묵을 남기려 애를 쓴다. 다 말하지 말 것.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일에 집중할 것.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에 공감한다면 필립 그로닝의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많은 이들이 보았겠지만 해발 1,300m 알프스 깊은 산맥에 뿌리를 내린 카르투시오 봉쇄 수도원 일상을 담아내었다. 침묵 속에서 하루가 깨어나고 침묵 속에서도 계절이 바뀌듯 영화는 시종 말이 없다. 필름은 마치 정물처럼 162분의 상영 시간 대부분이 침묵으로 흘러간다. 펜으로 글 쓰는 소리나 수도사들의 기침 소리 위로 가끔씩 들리는 수도원의 종소리가 청각을 메운다. 집중을 하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수도복을 재단하는 가위질 소리나 빗방울이 풀잎 위에 떨어지는 소리마저도 놀라울 정도로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때쯤 ‘언어가 사라진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라는 스틸컷의 글귀가 영상 위로 겹쳐지게 된다. 말을 줄이면 상대의 마음이 돋보이는 것처럼.
생각해보면 침묵에도 빛이 있고 언어가 있다. 말하지 않아도 지천으로 말하는 풀과 나무와 강물이 있다. 빈집에 돋아난 부추꽃이나 바위틈을 딛고 견뎌낸 늙은 소나무가 그러하고 바닥을 드러내는 여름 강이 말을 건넨다. 반면에 넘치는 인간의 말들이 얼마나 일상을 흩트리기도 하는가.
재미있는 일은 피카르트가 이 글을 쓴 제2차 세계대전 직후만 해도 라디오는 소통의 새로운 매체였다. 당시 그는 라디오의 기계음이 인간의 사유를 방해하고 내면을 지배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기계음을 들끓는 벌레 떼에 비유하며 ‘잡음어雜音語’라 명명했다. 잡음어는 침묵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만듦으로써 인간은 침묵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한다고 통탄하였다. 그가 우려했듯이 이전에 침묵이 놓인 자리에도 이제는 사물들로 빼곡하다. 만일 그가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끼고 사는 현대인의 삶을 엿본다면 뭐라고 할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카톡 문자 소리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
소음이 만연한 이 시대에 피카르트의 침묵을 제대로 해독해내기란 실로 힘든 일이다. 아마 평생을 읽어도 이 책의 완독은 어려울 것이다. 침묵은 추방당했다는 그의 말, 가만히 되돌아봐야 할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