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손 / 이정림
닭집 여자는 언제 보아도 안색이 좋지 않다. 손님이 없을 때는 한 길에 내놓은 나무 걸상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료히 바라본다. 언제나 똑같은 앞치마, 그리고 그 앞치마에는 언제나 핏방울이 점점이 튀어 있다. 붉은 기가 가신 그 얼룩들은 이제는 혈흔血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슨 무늬같이 보인다. 나이는 기껏해야 서른 안팎, 아직도 앳된 구석이 있으나 핏기 없는 얼굴에는 우울한 현실의 그림자가 기미처럼 깔려 있다.
닭집 여자가 하는 일은 매일 똑같은 일이다. 하루 종일 버둥대는 닭의 날갯죽지를 틀어쥐고 칼로 목을 따고 털을 뽑고 토막을 친다. 도와주는 일손도 없어 명절 때같이 손님이 붐비는 날에는 닭집 여자의 손은 기계처럼 움직인다. 찌르고 뜯고 자르는 그 기민한 동작, 마지막 기운으로 튀어 오른 선혈이 얼굴에 피곤지를 찍어도 그는 닦으려 하지 않는다. 얼굴을 닦는 일은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손님 하나라도 놓칠세라 잰 손놀림으로 닭을 잡는 것만이 그의 온 관심사인 것이다.
잠시 손이 놀면 언제 끌어내어 죽일지 모르는 그 닭들에게 모이를 던져 준다. 닭들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배추 이파리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고 서로들 밀고 당긴다. 생존 경쟁은 닭장 속에서도 이렇듯 치열하다.
닭들은 잘생기고 묵직한 것부터 골라내어지게 마련이다. 못난 놈일수록 늦게까지 남고 덕분에 오래 생명을 부지한다. 불티나게 닭집에 손님이 끓던 어느 명절날, 제일 나중까지 오도카니 혼자 닭장에 남아 있던 흰 닭 한 마리가 생각난다. 탐낼 만큼 잘나지도 못하고 홰라도 탁탁 쳐서 남의 이목을 끌지도 못한 그 무능함이 어찌 닭의 세계에만 한할 것인가.
닭집 여자는 아무리 바빠도 일요일에는 반드시 외출을 한다. 모처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가 가는 곳은 인근 성당이다. 그러나 교리를 배우러 성당에 가는 것은 아니다. 그가 거르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 성당을 찾는 이유는 오로지 고백성사를 하기 위해서다.
"신부님, 아무리 미물이라곤 하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살생을 하고서도 제가 벌을 받지 않겠습니까?"
신부의 대답은 굳이 들을 필요가 없다. 언제나 같은 것을 묻고 같은 답이 들어왔으므로.
그래도 그는 그 생각이 늘 가슴을 누른다고 했다. 닭의 모가지에 칼을 들이댈 때마다 그 칼이 자기 목을 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을 갖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성호 같은 것은 긋지 않는다. 자기 일터에서 성호를 긋는 일은 어쩌면 사치라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모두 그가 과부인 줄로만 알았다. 으레 남편과 아내가 도와가며 일하는 다른 집과는 달리 늘 혼자 분주해서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남편은 있었다. 남자는 달리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게 한 편에 붙은 손바닥만 한 살림방에서 그의 남편은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었다. 조금 열려진 틈새로 안을 기웃거려 보면, 남자는 언제나 낚시 도구만 한가히 손질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월척을 기념하는 어탁魚拓이 여러 장 걸려 있고, 그 주위로는 파리 떼가 불결하게 날아다녔다. 파리똥으로 얼룩진 자랑스러운 기록을 보면서 닭집 남자는 아마 자기 만족에 살아가는 모양이었다.
닭집 여자의 소원은 딸에게만은 이 짓을 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웃 닭집 딸처럼 자기 딸도 칼을 쥐게 될까봐 그것이 걱정이다. '딸은 어미의 팔자를 닮는다'는 말을 그래서 닭집 여자는 가장 싫어한다. 방 안에서 혼자 여유로운 그의 남편은 어떤 소원을 갖고 있을까. 월척의 대어大魚를 낚는 것일까. 남보다 많은 고기를 잡는 것일까.
그들 부부를 볼 적마다 나는 낚시 도구를 손질하는 닭집 남자의 깨끗한 손보다는 비록 칼은 쥐어 있을지언정 그 아내의 피 묻은 손이 더욱 아름답고 값지게 여겨진다. 그의 손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모양새가 예쁘다거나 실결이 고아서가 아니다. 그 손은 건강한 생활인의 손이며, 책임을 다하는 사랑의 손인 까닭이다.
닭집 여자는 손은 기도하는 손보다도 아름답고 성스러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