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두 개의 둥지를 탐내지 않는다 / 최장순
달을 등(燈) 삼아 개구리들이 낭랑하게 책을 읽던 곳이었다. 푸른 귀 열어젖힌 모가 그 소리로 나락을 키우고, 새들의 지저귐이 하루를 열었다. 별들의 자장가가 노곤한 하루를 닫았다.
낯선 걸음들이 마을을 밟기 시작하면서 평온은 지워졌다. 수질이 좋아서 온천이 들어설 거라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동네가 술렁거렸다. 온돌에 둘러앉은 엉덩이들이 들썩거리고 착하던 땅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하루아침에 기대 이상의 땅값을 쥔 사람들의 어깨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온천이 하나둘 들어서고, 몰려온 걸음이 개구리 소리처럼 왁자했다. 휘황찬란한 조명과 고성방가가 밤낮을 모르고. 우뚝우뚝 들어선 빌딩들이 키를 견주더니 분양가와 매매가가 들썩거렸다. 다방 한구석, 대화는 건물 평수로 시작해 평수로 매듭지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더니, 턱밑까지 자존심을 바짝 치켜 맨 넥타이들이 활보하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토박이들은 하나둘 고향을 등졌다.
솔깃한 소문을 찾아 얇은 귀들이 떼로 몰려가도, 도시로 나가자는 식구들의 애원에도, 오로지 농사에만 관심을 돌리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이 땅에 뼈를 묻으라는 생전의 아버지 말씀을 꽉 붙든 과수 농사꾼. 과실처럼 달린 자식들 입성이며 학비까지 모두 복숭아밭에서 거두었던 아버지의 업을 잇기로 했다.
오래전, 타지를 돌다 목을 꺾고 돌아온 그에게 아버지는 그해 복숭아 팔아 번 돈 전부를 손에 쥐어 주었다. 아버지의 당부를 앞섶에 넣고 돌아서던 사내는 눈물 젖은 입술을 물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해서 사업은 또다시 그의 편이 되지 못했다. 시린 바람이 쏴아, 가슴을 훑고 지나간 날, 과수농사에 잔뼈를 묻겠다는 결심은 귀향을 서둘렀다.
복숭아 재배는 만만한 게 아니었다. 발효퇴비는 언제쯤 주어야 좋은지, 가지는 언제 쳐줘야 하는지, 잎마름병은 어떻게 물리쳐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높은 당도가 스미는지, 알아야 할 것도 해줄 것도 수두룩했다. 이만하면 되겠지 싶으면 엉뚱한 곳에서 움을 틔운 문제들. 밥을 먹을 때도, 쉴 때도, 그는 온통 복숭아 생각만 했다. ‘복숭아’라는 말은 그의 뇌까지 타고 올라왔다. 뽀얀 복숭아 솜털에 살갗이 부어오르듯 부푼 머릿속이 따끔거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왔다. 웃음과 울음이 수없이 교차한 시행착오 끝, 복숭아가 그에게 눈웃음을 치기 시작하더니 사내의 과수농사는 슬슬 입소문을 탔다. 해마다 밭은 환하게 봄을 지피고, 당도 높은 여름을 그득 맺은 밭으로 입들이 몰려들었다. 음식에 한 번 더 간을 맞추듯 마지막 맛을 익혀가는 복숭아를 보면 밥을 먹지 않아도 그는 배가 불렀다.
세상은 변했다. 귀농을 새겨들으려는 이들이 찾아들었다. 그의 말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세웠다. 사내는 귀농 강사 겸 농부다. 그는 과수 농사를 설명하기보다 경험에서 얻은 몇 마디로 마음을 얻는다.
“저 나무들을 보세요. 새 둥지가 보이죠? 몸 누일 집 한 채만 있어도 새들은 두 개의 둥지를 탐내지 않아요.”
사내가 가리킨 나무마다 한 채 혹은 두 채의 둥지가 보인다. 한 마리가 지은 듯 크기도 비슷했다. 크기가 일정한 새 둥지처럼 그의 농사도 평수를 따지지도 묻지도 않는 농사법. 주거의 근사한 이름과 평수는 관심 밖, 자연이 주는 혜택과 열정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부드럽게 애무하는 봄볕에 서서 복숭아나무를 올려다보는 그의 뒷모습이 따스하다. 등에도 표정이 있는지 따스한 웃음이 둘러선 이들의 얼굴로 전염된다. 나도 빙그레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