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 홀리다 / 최민자
유원이가 태어나기 전, 나는 살짝 긴장이 되었다. 일찌감치 할머니가 된 친구들이 스마트폰에 아기 사진을 올려놓고 손주 자랑에 열을 올렸지만 나에겐 별스럽게 와닿지 않았다. 손주가 정말 그렇게 예쁠까. 내 아이가 아닌 딸의 아이가 나를 과연 좋아해 줄까. 내 할머니나 어머니처럼 할머니 노릇을 잘할 수 있을까. 내 뜻과 상관없이 맡게 될 배역에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건 기우에 불과했다. 아기는 당장 나를 매혹했다. 아기가 내게 오래된 미래였듯 나 또한 아기에게 전생의 현현顯現이었을까. 우리는 직방 눈이 맞았다. 딸네 집 현관에 들어서면 거실에서 맹렬하게 뒤집기 연습 중인 유원이가 가장 먼저 반색을 한다. 눈동자에 반짝, 불이 켜지고 입꼬리가 벙실 벌어져 올라간다. 기는 법도, 말하는 법도 터득하지 못한 이 작은 물텀벙이 아가씨는 물장구를 치듯 맨바닥을 첨벙대며 꼬리지느러미와 가슴지느러미를 사정없이 찰방댄다.
유원이와 나는 자주 눈을 맞춘다.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법을 나는 요즘 그에게서 배운다. 기저귀를 갈아 줄 때, 품에 안고 다독일 때, 나와 제 어미가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조용한 관찰자는 존재를 통째로 각인해 넣으려는 듯, 말똥말똥한 눈으로 사람을 빤히 올려다본다. 존재의 심연에 숨어 있을 무엇인가를 샅샅이 스캔해 내려는 듯이.
아기는 한 덩이 침묵이다. 훼손되지 않은 순일한 정적이다. 따스하고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이 침묵의 응결체 안에서도 이따금씩 미분화된 모음이나 간헐적인 파열음이 분출되어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걸 말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본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음률을 고르는 다스름 같은 것일 뿐.
침묵이 나를 검색한다. 진즉 무장해제가 된 나는 저 무구한 눈빛 앞에 조건 없이 무방비로 투항하고 싶어진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 성스러운 피안에 거처하는 어떤 신에게 저간의 죄업을 낱낱이 불고 흔쾌하게 백기라도 들고 싶어진다.
유원이가 벙싯, 나를 보며 웃는다. 최소한 저를 해치진 않을 거라는 안도와 호감의 표시일 것이다. 이 조그만 머리통이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눈빛을 반짝이고 입꼬리를 올려붙이며 좋아라 웃고 있는 아기의 머릿속에도 정보를 수집하여 저장하고 해석하는 일련의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다니, 그렇게 태어난 생각들이, 언어로 변환되지 못한 말의 유충들이, 뇌세포 사이를 흘러 다니며 더러는 반짝 빛을 뿜고 더러는 유실되어 혈관 속을 유랑하다 자취 없이 소멸되기도 할 터이다.
조그만 몸을 곡옥曲玉처럼 웅크리고 품 안에 잠든 아기를 바라본다. 벙글지 않은 꽃눈 같은, 차진 고요 같은 한 송이 침묵 앞에 가만히 코를 박고 큼큼거린다. "우리는 하나의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와서 또 하나의 어두운 심연에 도달한다. 이 두 심연 사이의 양지, 그것을 우리는 생이라 부른다."라고,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말했다. 그가 말한 심연이 이런 침묵 아닐까. 침묵을 파기하고 나온 말들이 다시금 침묵에게 소환당할 때까지, 적재된 에너지를 언어로 환치해 우화등선羽化登仙시켜 주는 소임이야말로 인간에게 부여된 생의 본령 아닐까.
몇 달, 늦어도 한두 해 안에 이 강고한 침묵의 틈새, 향기로운 연분홍 크레바스 같은 연한 입술 사이로 말들이 발화發話해 날아오를 것이다. 몸속 어디, 순하고 아늑한 안쪽부터 미세하게 허물어져 투명한 날벌레처럼 부화해 오를 것이다. 날아오른 말들끼리 몸을 섞고 나풀나풀 새끼도 칠 것이다. 내장된 말들이 다 끌려 나와 쭈글쭈글한 빈 껍질만 남게 될 때까지, 한 마리, 두 마리, 수천수만의 나비 떼가 아득한 미광美光을 뿜어내며 춤을 추듯 세상을 건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