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정강이를 찬 아내
이경수
그와 나와의 인연이 25년을 넘어간다. 짧지 않은 시간이라 흐지부지 끊어질 만도 한데 아직도 하루가 멀게 소식을 주고받으니 예사로운 인연은 아닌 듯싶다. 이렇게 오랫동안 그를 보아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세상살이에 참으로 무능하다. 그러나 사람살이 이야기를 할 때는 눈에서 빛이 나고 목소리는 맑아진다.
그는 이론과 제도 지식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삶을 원으로 삼고 있다. 그 원을 이루고자 오래 전 오지마을로 들어갔다. 머릿속에서 그리던 삶을 가슴 부풀려가며 시작했다. 무엇이든 바쁘게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느긋하고 느린 생활 그러면서 밖이 아닌 안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맘껏 누리게 되었다. 주변의 산세와 풍광이 그의 가슴을 내밀게 하고 어깨를 으쓱거리게 했다. 하지만 어디가나 먹고 입고 살아야 하는 일이 있다. 사람 사는 일이 어디라고 만만할까. 그의 삶이 차츰차츰 먹고사는 일로 기울고 있다. 그러나 아내는 그를 믿으며 무너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의 신산한 현실을 위로하는 길은 오직 그를 믿어 주는 것이다.
그의 집에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든다. 그러면 아내는 할 일이 많아지고 그는 말이 많아진다. 사람들과 마주 앉아 공자를 비롯해 육조대사와 선사들을 들먹이며 참선이 어쩌고 화두가 어쩌고 할 때는 그의 무능한 현실은 사라지고 이상만 너울댄다. 이야기하기를 좋아해서 뜻 맞는 사람과 밤을 지새우고 싶은 게 바람 중 하나이지만 아직까지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뜻 맞는 사람이 아니라 한 여인을 만난다. 그 여인에게 꽂혀 그리워만 하다 입맛까지 잃는다. 끝내 몸져눕고 말지만 아내는, 제 시름에 못 견뎌 쓰러진 줄로만 안다.
그가 여인을 좇느라 몸도 마음도 가누지 못하고,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는 늪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의 마음자리를 의심했다. 그에게서 누구나의 모습이 아닌 남다른 모습을 보고자 한 것은 나의 욕심일까. 비록 나 자신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속되지 않은 맑은 모습이 선물이고 희망일 수가 있다. 나에게는 그가 바로 이런 존재이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다. 그런데 그도 말만 그럴 듯 늘어놓는, 그래서 그 말재간으로 나를 환상에 빠지게 한 것이 아닌가 하여 허탈해 졌고 화가 났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나 상사병에 걸렸었나 봐요”했다.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예쁜 여자를 보면 딴생각을 은근히 품어보기도 했는데, 지금은 감정에 휘두르기보다 다스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일상이 이쯤 되고 보니 아내의 심사는 늘 불편하다. 언제나 그녀만 동동거리다 허리 병나고 무릎 나가고 몸살감기는 아예 달고 산다. 그는 쌀독이 비는지 차는지도 모르고, 아니 이런 것은 자기 영역 밖이라는 듯 모르는 척 한다. 그렇다고 살림을 축내거나 누구에게 상처 주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아내는 그의 짓이 마냥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그의 뜻을,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에 투정 한번 부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집안의 가장 노릇을 소홀히 하는 것엔 서운하고 밉다.
그가 어느 날 전화를 해서 잔뜩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아내랑 아들이랑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점심때가 가까워오자 시장기가 돌았다. 한데 점심 준비를 해야 할 아내가 일만 하고 있다. 점심이라야 아침상에서 남은 찬에 밥만 퍼 놓을 텐데 그나마도 할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그래서 아들에게 슬쩍 한 마디 했다.
“공자는 음식 솜씨가 없다며 아내를 내쫓았대.”하며 말을 더 이어가려는데 아내의 쇳소리가 들렸다.
“공자는 뭔 놈의 공자. 입만 살았지. 돈을 제대로 벌어다 주기를 하나. 집구석을 돌보나. 꼴에 반찬투정을 해. 나 같으면 정강이 한 대 걷어차고 나온다.”
숨도 안 쉬고 내처 쏟아내는 아내의 반격에 잠시 멍했다. 날벼락을 맞은 듯 뒤통수가 띵했다. 깜깜하던 머릿속에서 빛이 터졌다. 눈앞이 환해지면서 통쾌한 기분에 온몸이 오싹해 졌다. 그러면서 그는 노바를 만났다고 했다.
공자는 그의 안에서 성인군자로 군림했다. 사람의 행동거지를 바르게 잡아주겠다며 종종 공자를 내세웠다. 그의 관념에서 옴쭉도 않던 공자였다. 아내가 안하무인으로 공자의 정강이를 치자, ‘감히 공자의 정강이를….이 아니라 공자의 정강이도 칠 수 있는 것을….’ 깨달았다. 성인이라는 선입견에 매몰된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안에서 공자가 사라졌다. 그 뒤로 그는 아내를 ‘노바’라 불렀다. 노바는 그만이 쓰는 노파라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노파란, 금강경을 바랑에 넣고 다니는 스님에게 “과거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는데 어느 마음에 점을 찍겠느냐?”라고 한, 그래서 금강경에 대한 스님의 집착을 버리게 했다는, 점심(點心)의 유래에 나오는 그 노파를 이르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일주일에 사흘을 장터에서 보낸다.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어 하루 정도 쉬다가, 다음 장터 갈 준비를 한다. 그리고 이따금 찾아오는 손님들도 챙겨야 한다. 물론 그도 일머리가 밝고 게으르지 않아 아내에게 없어서는 안 될 짝이지만, 가끔 딴 짓으로 시간을 허비하여 아내를 곤혹스럽게 한다. 어쨌거나 지금 아내는 가족들에게 삼시 세끼 챙겨줄 겨를도 여력도 없는 상태다. 그런 아내에게 공자를 빙자해 불만을 토로하다 애먼 공자님만 정강이를 채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