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재미수필 신인상
<장려>
< 아내의 반지 >
이 걸 남
아내는 작은 주머니 하나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 주머니에는 흰 종이로 덧싼 아내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결혼 할 때 아내에게 다이아 반지란 것을 해주지 못했다. 교사생활의 얄팍한 봉급 탓도 있었지만, 동생들의 학비를 도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진보라 색 자수정 반지를 예물로 했으므로 나는 그 일이 늘 미안했다.
그런 연유였을까? 의류사업으로 조금은 살 만해졌을 때, 아내는 몰래 비자금을 조성해서 다이아 반지란 것을 장만했다. 하기야 늘 멋대가리 없는 남편이었으니 뒤 늦게라도 그런 비싼 반지 해 줄 것을 기대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 화려 뻔쩍해 보이는 반지가 도대체 몇 캐럿쯤이 나가는지 관심조차 없었지만 오늘 그 반지가 팔려나갈 운명이 된 것만은 분명했다.
“여보, 뭘 그러고 있어요? 얼른 다녀와요.”
하지만 아내 재촉에 나는 선뜻 일어 설 수가 없었다. 그동안 아내가 애중지중하며 별로 끼어보지도 못한 반지가 아니던가, 그랬지만 이렇게 재촉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제 서슬이 퍼런 세무공무원 몇이 갑자기 봉제공장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달 째나 밀려있는 세금을 당장 내지 않으면 공장 문을 닫도록 하겠다며 협박성 으름장까지 놓고 갔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일은 엄포수준이 아닐 수가 있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세금이라면 무덤까지 쫓아가서 받아낸다는 바로 미국 땅이 아닌가 말이다. 만일에 공장 문을 닫게 된다면 삼십 여명의 일꾼들과 생계를 나누던 이 봉제공장의 운명은 어찌 할 것이며, 또 마지막 남은 버팀목마저 무너진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아직 학교도 다 마치지 못 한 세 아이들에게 나는 무슨 변명을 할 것인가?
“늘 하나님만 의지하고 열심히 살면 성공한다.”고 말해 오지 않았던가.
갑자기 닥쳐든 불경기는 잘 해가던 의류제품 사업을 접도록 했고, 또 그 바람에 살던 집마저 날아가 버렸는데 더구나 어느 멍청한 변호사로 해서 우리는 기약이 없는 불법체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형편에서 그나마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 봉제공장 마저 잃는 다면 사실상 우린 갈 곳이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바지주머니 속에 있는 아내의 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일어섰다. 별 뾰족한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우선 다운타운 중심가에 있는 보석거리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곳에는 일찍이 우리교회 장로님이 운영하는 보석점포가 있었고 또 서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혹시 좋은 가격으로 반지 값을 쳐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공장 밖으로 나온 나는 착잡한 마음을 누르고 그리 멀지않은 다운타운 길로 접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보석점포 길에서 한참이나 두리번거리다 겨우 장로님 점포를 찾을 수 있었다.
잠시 주저하며 들고 온 반지를 장로에게 건네주고는 값을 잘 쳐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장로가 요리조리 반지를 살펴보는 동안에 어깨가 쳐져있는 나는 그 귀추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자 장로는 아내의 반지를 내게 다시 돌려주며 시큰둥하다는 표정으로 한마디를 던진다.
“안 집사님 반지로군요, 그런데 이건 요즘 시세가 영 없어서......”
그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라목처럼 잔뜩 움츠러든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말았다.
“젠장,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갈 것을 그랬구나.” 그런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자신의 일로 바쁘던 탓일까, 잠깐 앉으라는 말은커녕 그 뒤로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다. 교회에서 늘 거룩하게 기도하던 모습과는 딴판이라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제 여편네의 반지까지 들고 나왔을까?’ 혹시 이런 값싼 동정을 기대했다면 그것은 내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이윤추구 외에는 어떤 최상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바로 여기가 그 시장바닥 아닌가 말이다.
반지를 돌려받은 나는 황망한 마음으로 보석점포를 빠져 나왔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 갈 수는 없는 일, 봉제공장 먼지 틈에서 고생하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자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햇볕이 쏟아지는 너른 길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모두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는 것일까?”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으니 아직 아내의 체온이 남아 있는 듯한 반지가 만져진다. 그리고 나와는 상관도 없는 사람들 틈에서 나 역시 알 수 없는 행로를 걷고 있었다.
‘이제껏 고생시킨 것도 모자라서 아내의 반지까지 들고 나온 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자책 때문인지 걷는 다리가 힘없이 휘청 인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잠시 숨을 돌리려는데, 어느 건물에 ‘Pawn Shop’ 이라고 쓰인 간판 하나가 눈에 뜨였다. 그리고 보니 말로만 들어오던 미국의 전당포다. 평소라면 인연이 없을 곳이지만 언 듯 아내의 반지를 잡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건물 앞에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고는 이중문으로 된 전당포 안으로 들어섰다.
전당포 주인으로 보이는 백인 영감님이 주저하며 꺼내 보인 아내의 반지를 외눈 렌즈를 눈에 끼고는 요리조리 살핀다.
‘혹시 이곳에서도 퇴짜를 맞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걱정으로 잠시 서있는데 깐깐하게 생긴 흰머리의 영감님이 흘깃 나를 바라보더니 즉석에서 8,000불까지 주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내가 처음 산 가격에 절반이라도 처 주는 셈이니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 우선 이것이라도 들고 속히 세무 청을 찾아가서 공장의 폐쇄만이라도 막아야 한다.
부지런히 세무청의 주소를 찾아갔다. 낯선 사무실의 경직된 분위기, 그리고 처음 보는 키다리 백인 사무관의 모습이 위압감으로 느껴져 온다. 창구 앞으로 다가가 능숙치 못한 영어로 내가 이곳에 온 사유를 대충 설명했다. 그리고 방금 가져온 전당포 영수증과 현금을 함께 내밀었다.
무표정한 모습으로 서있던 내가 내밀어 준 돈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그 것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어떻게 하든지 나머지의 모자라는 액수는 나누어서 낼 수 있도록 사정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갔다. 다시 창구로 돌아온 키다리 사무관은 조금 전에 무뚝뚝하던 모습과는 달리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불쑥 손을 내밀며 내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다. 적지 않게 밀려있었던 나머지 세금 모두를 탕감한다는 것이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몇 번이나 더 물었지만 그렇게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방금 전당포에서 현금으로 바꾸어 온 아내의 반지를 결혼반지로 알았음이 틀림없었다.
하기야 국가의 납세의무를 위해서 평생 간직해 두어야 할 결혼반지를 들고 나왔다면 신문에라도 내야할 일이요 표창까지 해주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길거리로 헤매던 어려움을 우리부부는 혼신을 다해서 넘기게 되었고 우리는 그 뒤에 기적을 이루어 가업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슴을 아프게 했던 아내의 반지도 되찾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변함없는 일은 주일이 되어서 교회로 가면 다운타운 보석가게 장로님의 거룩한 기도를 여전히 들을 수가 있었다.
< 당선 소감 >
어느새 가을 하늘이 더욱 깊고 푸르러 보입니다.
그동안에 서투른 글로 쓴 것을 수필이란 이름으로 달아놓고 보니 어쩐지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조금은 쑥스러운 일이라고 생각 했는데, 뜻 밖에도 수상이란 통보를 받고는 이번 기회가 작품성의 우열보다 더욱 정진하라는 뜻으로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공학을 전공했던 사람으로서 문학은 아주 먼 나라의 얘기였습니다. 더구나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이민생활에서 마음을 가져 볼 여유조차 없었지요, 겨우 은퇴란 것을 하고서야 지나온 삶과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것을 문학이란 틀 위에 올려다 놓는 다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처럼 이제라도 용기를 내서 더 아름다운 글을 써 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자신의 심정입니다.
바쁜 생활 중에 이민문학 발전을 위해서 애쓰시는 임원님들과 문학을 사랑하는 여러 동우들께 지면을 통해서 심심한 사의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