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리 (靑里)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靑里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작은 면 소재지이다.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내게는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추억이 담긴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다.
내가 살던 집은 마을에서 유일한 의사이신 아버지의 병원이기도 하였는데 기차역 쪽으로 가까이 있었다. 내 어린 귀는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익숙하였고, 나는 종종 집 뒤의 채소밭에 서서 기차에 탄 사람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 주며 미소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기차가 다니지 않을 시간에는 레일 위를 걸어다니기도 하고, 햇빛 받아 따뜻한 레일 위에 고모와 앉아 놀기도 하였다.
채소밭에는 상추, 고추, 오이 등이 싱싱하게 자라나고 있었고, 담장 위로는 샛노란 호박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큰키의 옥수수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기도 하였고, 나는 옥수수수염을 따다 그것을 땋으며 인형놀이도 하며 놀았다.
뒷마당 담장 옆으로는 커다란 호두 나무와 감나무도 서 있었다. 할머니는 새벽 일찍 일어나셔서 떨어진 호두를 주워 모아 두었다가 먹기 좋게 깨어 어린 나에게 주시곤 하셨다. 나는 떨어진 하얀 감꽃을 실로 꿰어모아 꽃목걸이를 만들어 걸기도 하고, 아직 익지 않은 땡감을 소금물에 절였다가 먹기도 하였다.
지금도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던 하얀 성당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언니와 나는 일요일마다 싱싱한 다알리아나 장미꽃을 꺾어다 미사 시작 전 제대에 바치곤 하였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양쪽 벽으로 십자가의 길, 14처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그 성당에 잠시 주임 신부로 계시던 파란 눈의 프랑스인 신부님 작품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오토바이를 타고 오셔서 적막하던 성전을 화려하게 장식하셨던 까만 베레모를 쓴 신부님 모습은 작은오빠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오빠는 오늘날 자신도 화가가 되어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성당을 나오면 끝없는 오솔길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그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상엿집이 나온다. 동네 사람들이 생을 마치고 저승길 갈 때 한 번씩 태워주는 상여다. 마을 아저씨들 여럿이 상여를 함께 지고, 애통히 곡을 하며 마을 한 바퀴를 돌아 산으로 향하곤 했다. 나는 그 상엿집 앞을 지날 때마다 무서움에 떨며 내 초등학교까지 줄행랑을 놓곤 했다.
교실마다 나지막한 책상과 걸상이 있던 그 학교, 아직 그대로 있을까? 나는 아직도 그 언덕길을 따라 걷고 싶다. 언덕밑으로는 얕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물을 건너면 산이었다.
산, 아련한 내 기억 속의 산, 어질고 어진 어머니의 품속같은 산. 환하고 따뜻한 빛이 항상 내리쬐던 그 산, 그 풍경은 내 마음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 내가 靑里를 떠나 도시의 이방인이 된 지 오래지만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 하늘과 산이 있다.
그 산은 그곳 아이들의 요람과 같았다. 우리는 거기서 마음껏 뛰어놀고 그 언덕에서 구르곤 하였다. 할미꽃 피어있던 양지바른 어느 무덤 앞, 따뜻한 돌 제단에서 아이들과 소꿉장난도 했다.
한번은 내 동갑내기 성당 친구, 말구를 꾀어 들꽃을 꺾으러 간 적이 있다. 가다보니 깊은 산에까지 들어가 둘이서 정신없이 향기나는 꽃을 꺾다보니 어느새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 용케 길을 찾아, 들국화를 한 아름 안고 산을 내려오던 그날 일은 아직도 내게 벅찬 행복감을 준다.
우리 집 건너편에는 내 소꿉친구 미현이가 살고 있었다. 그애의 부모님은 건어물상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미현은 언니와 책상을 나란히 하고 한방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여학생> 잡지를 보길 좋아했고, 미현의 언니가 김치를 넣은 라면을 내게 정성껏 끓여주곤 했다. 나는 아버지가 용돈으로 10원을 주시면 크라운 산도를 사서 미현이와 나눠 먹곤 하였다.
병원 앞마당에서 놀다 웬 동네 사내아이가 타던 자전거에 내 허리를 치었던 일도 있다. 그 상처 자국이 아직도 내 오른쪽 허리에 있는데 그건 마치 청리 시절을 기억하게 해주는 문신과 같다.
밤이면 멍석 펴고 앉아 동네 할머니들에게서 옛날이야기를 듣던 일도 정겹다. 둥근 부채를 든 할머니들의 사투리 섞인 두런두런 이야기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퍼져나가고 아이들은 서늘한 밤기운의 애무를 즐기며 밤하늘의 별을 세고 있었다.
여름이면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뜨거운 바윗돌에서 젖은 빨래가 마르는 동안, 헤엄을 치고 놀았다. 그런데 어느 해 장마가 들어 강둑이 범람한 적이 있었다. 거센 물살위로 각종 농산물과 가구, 혹은 살아있는 가축까지도 떠내려가고 있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기억도 있다.
가을엔 황금빛 들판에서, 햇볕에 온통 얼굴을 그을리며 메뚜기를 잡기도 하고, 코스모스 알록달록 핀 오솔길을, 함박웃음을 지으며 친구들과 끝없이 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청리에서의 내 어린 시절은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끝이 나 버렸다.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셔서, 우리 남은 가족은 외갓집이 있는 서울로 떠나와야 했다.
눈을 감으면 언제나 갈 수 있는 청리, 지치고 힘들 때 나의 힘이 되어 주는 고맙고 소중한 나의 유토피아! 그 한없는 환희와 평화를 다시 느껴본다. 맑고 순수한 세상, 빛이 가득한 그곳은 언제나 내 마음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靑里는 내 마음의 고향이다. 나는 오늘도 내 영혼의 기차를 타고 고향을 향하여 달린다.
고향의 모습이 그림처럼 보여집니다. 이제는 사라져 버렸을 지도 모를 옛날 고향의 모습이지만 그 아련한 추억과 기억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가보고 싶은 그곳, 이제 세월이 흘러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지만 기회가 되면 옛날 어린시절이 깃든 그곳으로 가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