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 쏠스티스 2012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헬레나 배

     내 생애 가장 잊히지 않을, 지난 삼일간의 동지 축제 체험을 오래 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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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세도나에 도착했다. 성전처럼 수려한 붉은 보택스 산들을 마주 보며 황톳길을 달리자니 5년 전에 처음 여기에 왔던 감회가 새롭다. 마고 가든에 정해진 나의 숙소를 찾아 여장을 푼 후 워크샾 장소인 HSP Hall에 들어서니 방안 가득 향기로운 꽃들이 군데군데 놓여있고 수십개의 촛불들이 아늑하게 밝혀져 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젊은 한국 여성이 문 앞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는데 바로 그녀가 이번 ‘Winter Solstice 2012 Celebration - The New Beginnings' (’2012 동지 축제 - 새로운 시작‘)의 프로그램 디렉터 '해정'이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벌써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앉아 있다. 





     우리는 돌아가며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시작하였다. 키가 유난히 작아서인지 만화 영화 속의 착한 요정할머니를 연상시키는 패티, 점술인 같은 분위기의 아스타라,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감각의 스피치 떼라피스트 에드워드, 중학교 선생님 이셨던 케티, 니콜 키드먼이 온 줄 착각할 정도로 우아한 모습의 수잔,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중후한 느낌의 프랭클린, 날렵하고 이지적인 란, 세계 일주를 하던 중 우연히 들리게 되었다는 한국인 아가씨 진희, 멋쟁이 뉴요커 스테이씨, 그리고 점잖은 백인 할머니 캐롤등 대략 열두 명 정도의 참가자가 함께한 지난 2박 3일은 참으로 값진 시간이었다.

     고대 마야 문명의 발생지였던 페루의 안데스 산맥 아래에서 조상 대대의 메디신 맨 와찬과 그의 아내인 마리까, 그리고 그들 사이의 사랑스러운 딸, 시과겐티는 온건한 잉카 문명의 Medicine 가족이다. 나는 와찬을 처음 보았을 때 사람이 ‘자연’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연’이어야함을 알게 되었다. 긴 머리를 뒤로 길게 땋아 내리고 고유의 화려한 복장을 한 그는 있는 그대로 자연 자체였다. 그의 눈은 강열하였고 그의 목소리는 몇 천 년의 세월을 타고 흘러온 듯 깊었다.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 나의 영혼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구불구불한 검은 긴 머리에 둥글게 목이 파인 흰 불라우스를 즐겨 입던 마리카는 대지의 어머니인 ‘파차야마’처럼 인자하면서도 맑은 심성이 눈빛에서 느껴졌다. 시과겐티 또한 열네살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심신이 조화를 잘 이룬 건강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참회의식이 시작되었다. 와찬이 깨끗한 솜뭉치를 나눠주며 그것을 조금씩 떼어내어 왼쪽 귀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자기의 모든 잘못과 좋지 않은 기억들들 하나씩 그 솜에 묻혀 닦아내도록 하였다. 그 다음에는 깨끗한 탈지면으로 오른쪽 귀에 원을 그리며 그 모든 과오를 바로 잡게 하였다.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우리는 촛불을 밝혀 둔 채 첫날밤을 보냈다.

     2012년 12월 21일 금요일, 동지

     동지(Winter Solstice)는 겨울이 시작되는 첫날이며 일 년 중 가장 밤이 긴 날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2012년의 동지는 마야 달력의 마지막 날이라 하여 많은 예언가들이 지구의 종말을 예측한 날이기도 하다. 그들의 설에 의하면 이 날을 기점으로 인류의 의식과 우주의 기운이 전환하는 새로운 시대(New Era)가 열리게 되는 아주 신성한 날이다.

     이제 해맞이(Sunlight Meditation)를 하러 갈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걸아서 'Altar'(제단) 라고 불리는 둥근 파이어 플레이스로 갔다. 와찬이 거기에 먼저와 불을 지피고 있었다. 장작을 질서 있게 포개 놓고 거기에 향유와 허브들을 뿌려가며 정성들여 피운 아름답게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우리는 새로운 태양을 기다렸다.


     

     정성과 사랑 - 이것이 내가 그 메디신맨을 표현할 수 있는 대표적인 단어이다. 여러 가지 의식을 거행하는 매순간 마다 그는 온 정성을 다하여 그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둥글게 돌아가며 춤을 추는 동안 와찬의 전위예술작품인 불길은 하얗게 제 몸을 태우며 재로 변하고 있었다.


     마침내 해가 떠올랐을 때 우리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해를 바라보았다. 그 해는 강열하고 건강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태양의 색깔이 다르게 보였다. 처음에는 황금색과 핑크색, 고운 피와 같은 선홍색,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둣빛과 코발트색의 빛살이 직통으로 나의 제 3의 눈을 꿰뚫고 있었다. 나는 이 기적 같은 순간에 경이로움에 떨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점심식사로 연어구이와 샐러드, 그리고 커피를 마신 후 우리는 ‘힐링 호수’가로 모였다. 와찬이 알록달록한 보를 깔고 그 위를 아름다운 꽃과 보석, 조개 등으로 장식하였다. 그가 우리에게 새 솜과 크리스탈 조각을 주며 거기에 파차야마(어머니 대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세 번 불어넣으라 하였다. 그런 다음, 그 제물들을 소중히 둥근 보위에 안장하고 그 위에 붉은 장미꽃잎과 코카 잎사귀들을 뿌리고 음악을 연주하여 기도를 바친 후 한 나절 햇빛과 바람을 쐬도록 두었다. 한 아름의 꽃다발도 함께. 와찬은 꽃은 바로 영혼의 상징이라며 매우 신성하게 다루었다.



     HSP홀로 돌아와 '해정'님의 지도 아래 요가와 신비스런 비젼 명상을 한 후 다시 힐링호수에 모여 한사람씩 줄지어 악기를 연주하며 불의 제단으로 향했다. 돌아가며 제물을 바친 후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오른 쪽으로 세 번 또 왼쪽으로 세 번, 어떠한 뜻이 담긴 행위인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눈물은 그냥 흐르게 두라. 어두움의 과거, 모든 어리석음과 못남, 쓰라렸던 마음을 통회하라. 그리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사랑을 베푸시는 신께 용서를 빌며 감사하라. 모든 이들의 솜뭉치와 크리스탈이 불의 화신에게 던져졌다. 장작은 고운 주홍빛을 발하며 활활 타오르고있다. 모든 과거가 사라지며 새로운 희망의 불꽃으로 거듭나고 있다. 



     어느 듯 어둠이 내려와 주위를 포근히 감싸기에 총총한 별을 보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가 나는 예측치도 못한 놀라운 광경에 그만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반달 주위로 커다란 달무리가 져있었다. 나는 그런 달무리를 내 평생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마치 동그랗게 함께 앉아 있던 우리의 혼이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 달 주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혹은 하늘이 동그랗게 열려져 지구와 교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2012년 12월 22일 토요일

     마지막 날 아침 HSP Hall에 모여 다시 원으로 둘러앉았다. 와찬이 여러 가지 기묘하게 생긴 피리와 타악기들을 가져와 우리 주위를 빙빙 돌며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마리카가 북을 치며 청명한 목소리로 원시적인 노래를 불렀다. 태곳적부터 불어오는 바람소리, 파도 소리, 세월의 소리가 들려왔다. 산이 생기고 산이 사라지고 수많은 낮과 밤이 교차하며 수만 개의 별들이 반짝이며 사라지곤 하였다. 와찬이 말하였다. 이 모든 소리는 우리 안에서 나는 소리라고.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연주되고 있는 음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그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 하였다. 글을 읽을지도 모르는 그의 어머니였지만 얼마나 지혜로우셨던 가를, 그리고 잉카의 제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일곱 살의 소년에게 어떻게 새 생명의 출산을 목격하게 하였으며 신성한 의술을 이어 받도록 한 이야기도. 우리의 어머니 ‘파차야마’와 ‘자연’을 믿고 아무 것도 겁내지 말고 “오직 자기 자신이 되라!”( Just be yourself!)’던 그의 말은 얼마나 부드럽고 확신에 차있었던지.





     마지막으로 나는 홀로 ‘힐링 락’(치유의 돌)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붉은 흙이 가지런히 줄지어진 사이로 희고 고운 잔돌들이 깔려진 길을 걸으며 나는 무언가를 간절히 구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떠한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내 영혼이 깨어나는 소리였을까? 나는 그 소리를 듣고 그만 목 놓아 울어버렸다. 아, 나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하여 그 먼 길을 달려오지 않았던가?

     다시 도시로 돌아온다. 나는 더 이상 떠나기 이전의 내가 아니다. 이제 오직 매순간 죽고 매순간 다시 태어나는, 태고로부터 부는 숨결일 뿐, 온 천지 가득한, 한없이 충만한, 그리고 영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