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자 고모

                                                                                                                                                                               헬레나  배

 

 내 어린 시절 기억의 한 페이지에 ‘옥산 아저씨’가 있다. 검은 얼굴, 가늘고 예리한 눈매,  짱구 머리에 반 곱슬,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의 노총각이었던 그는 옥산이라는 작은 면에서 살고 있었는데,  나의 아버지와 대화 상대가 되어 근교의 "청리"면 소재지 에 있던 우리 집에 가끔 찾아오곤 하였다.

 

 아버지와 그는 한자리에 앉으면 해박한 지식을 장시간 서로 주고받곤 하셨다. 그럴 때면 나는 꼭 두 분 사이에 끼어 앉았다.  그 아저씨가 무엇이든 하도 막힘없이 아는 것이 많아서 할머니께서는 아버지께 넌지시, “저 사람이 하는 말들이 도대체 맞는 말들이냐?” 하며 종종 확인해보시곤 하셨는데,  그럴 때면 아버지께서 웃으시며 그 젊은 총각의 박식한  지식을 인정해 주시곤 하셨다.

 

 그 무렵, 나의 고모뻘 되는 젊은 아가씨가 우리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할머니 여동생의 막내딸이었는데 그녀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위의 형제들이 모두 결혼한 후, 이모 되는 할머니를 찾아 왔던 것이다.

 

 우리 형제들은 그녀를 ‘광자 고모’라고 불렀다. 그녀는 경상도 말투를 쓰던 무뚝뚝한 우리와는 달리,  서울 토박이 말투를 썼고  심성도 섬세하고 연약한 여자였다. 하얀 얼굴에 귀여운 미소의 한창 피어오르는 청춘이었다.

 

 그녀는 우리 집안일을 거들기도 하며 어린 나를 돌봐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는 불행하게도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이종 사촌오빠 집에서 살게 된 철부지 처녀였을 따름이다. 그런데 인연이란 언제나 예측 못 할 일이어서 우리 집은  광자 고모와 옥산 아저씨의 데이트 장소가 되었다.

 

 옥산 아저씨는 고모를 한 번 본 후에 그야말로 뻔질나게 본격적으로 우리 집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내가 학교도 들어가지 전이니까 나의 기억이 희미하긴 하지만, 지금도 한쪽으로 머리핀을 꽂은 단발머리와 작은 키에 좀 통통한 몸, 그리고 그녀가 자주 입었던 특이한 색깔의 치마가 생각난다. 까만 바탕에 추상적이면서 화려한 원색 프린트 무늬가 있던 넓은 스커트를 유독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린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도 옥산아저씨를 좋아하였다. 물론 첫사랑이었을 테고.  우리 가족들이 조금 무색하고 샘이 날 정도로 그들은 우리 집에서 행복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잘 몰랐지만, 그 작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서 두 젊은 남녀는 정말 감미로운 사랑을 나누었으리라, 기찻길 따라 한없이 걷기도 하고 아름다운 앞산과 수풀 사이의 오솔길을 두 손 잡고 걷기도 하고.

 

 그녀는 마침내 옥산 아저씨와 결혼하였고 한 가정을 일구었다. 그 후 우리 집에는 여러 일이 닥쳤다. 갑작스레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셔서 남은 가족은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병원을 정리하고 외가가 있는 서울로 가게 되었다. 나는 서울의 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고, 서울에 와서 그전과는 전혀 다른 도시생활에 적응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방학 때마다 시골 할머니 집으로 내려갔고 그때마다 옥산 고모에 관한 이야기를 할머니께 전해 듣곤 하였다.  가난한 고모가 할머니를 가끔 찾아뵈러 올 때마다 할머니 잡수시라고  어김없이 ‘고기’와 간식거리를 사 들고 오곤 하여, “돈도 없으면서 제발 그러지 좀 마라”고 할머니께서 고모를 야단을 치곤 하셨다. 하지만  고모가  그 말씀을 듣지 않아 할머니 속이 상하시기도 하고 그 정성이 고맙고 갸륵하기도 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녀는 결혼한 후에도 유독 나를 아껴주었다.  어느 여름 방학 때 그녀는 나를 버스에 태워 옥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려가 준 적이 있다. 세 들어 사는 작은 방에 아이들이 올망졸망 있고, 어린 내가 보기에도 살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고모는 고구마와 옥수수를 삶아 나에게 먹으라고 내어 주어 모두 둥글게 앉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아직도 그녀를 못 잊는 특이한 이유가 하나 있다. 그즈음 어떤 꿈을 꾸었다. 왜 하필 그런 꿈을 꾸게 된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꿈속에 그녀가 햇볕이 뜨겁게 내리쪼이는 모래밭에서 온몸이 땅에 파묻힌 채 동그랗고 작은 얼굴만 내놓고 괴로워서 신음하며 "헤레나 헤레나“ 하며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건 마치 어떤 형벌을 받는 모습 같았다. 나는 꿈을 깬 후에도 너무나 끔찍한 고모의 모습에 놀란 가슴을 혼자 오래 간직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거리상 떨어져 살았고 마음대로 왕래할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어린 나는 그때 어떠한 도움도 그녀에게 주지 못하였다. 

 

 광자 고모의 죽음을 전해 들은 것은 내가 미국에 오고 난 후였다. 옥산 아저씨는 그의 천재성을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변변한 직장도 가져보지 못했다. 착하고 온순하기 만 한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제대로 보살펴주지도 못하면서 그냥  고생스런 삶을 지속해오던 중,  고모가 그만 암에 걸려 일찍 세상을 뜨게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나의 꿈이 그러한 어떤 예감이 아니었나 싶다.

 

 그녀에겐 아들 성대와  ‘애덕’이라는 딸아이가 있었는데 그녀는 유독 자신을 닮은 그 소녀를 예뻐했다. 친척들로부터 간간이 전해 들은 얘기에 의하면 그녀가 세상을 뜬 후 옥산아저씨와 남은 아이들이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실 때, 옥산 아저씨가 문안차 할머니를 찾아와 자기 아내를 고생시켰던 지난날을 울면서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고모의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다들 잘 살아가리라. 그들은 알까? 그들의 엄마가 젊고 예뻤던 시절 어떤 치마를 입고 있었는지,  고운 서울 말씨가 조금 느리고 어눌한 경상도 사투리로 변해가던 때의 이야기들을 기억할까,  그녀의 장난기 가득하게 반짝이던 눈빛과 그녀의 앳된 젊음을 떠올릴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녀가 얼마나 자기들을 애지중지 사랑했는지를.

 

언젠가  고국에 나가면 꼭 그들을 만나보고 싶다.  해박하고 당당하시던 옥산 아저씨는 지금은 무엇을 더 알고 계신지  꼭 한번은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나는 더는 ‘왜’ 하고 묻지 않겠다.  그냥 잔잔히 웃으며 내 고향 가는 기찻길 따라 한없이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