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풍에 말린 조기인 굴비가 그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대 세도가였던 이자겸은 인조에게 반기를 들다 전남 영광으로 유배 가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이 맛난 생선에게 자신의 의지를 실어 ‘굽힐 굴(屈)’ ‘아닐 비(非)’, 굴비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힘든 상황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비장함이 배어 있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요리 레서피를 읊는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에 나온 대사다. 에피소드마다 마트에 가서 신선한 식재료를 사와 남편이 차린 정갈한 밥상이 소소한 일상 속 감동의 편지 같은 드라마로 마음을 치유 받았다. 강창래 작가의 에세이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문학동네)가 원작이다. 떠나는 아내의 밥상을 차리는 남편의 부엌 일기라는 책의 부제가 드라마에서 영상 일기가 되었다.
인문학자인 강창래 작가는 라면 밖에 끓일 줄 몰랐던 남편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암 투병을 하게 되자 그녀를 위한 요리를 하며 써내려간 메모들을 엮어 2018년 책으로 펴냈다. 시한부라는 무거운 소재를 고통과 아픔 대신, 요리가 주는 짧은 기쁨으로 그려낸 베스트셀러를 드라마로 만들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먼저 보고 나중에책을 구입해 읽는 입장에서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그랬다. 인쇄된 활자를 읽고 있는데도 한석규의 오디오북을 듣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결국 책을 덮어 버리고 한국TV를 틀어 한석규가 부엌에서 콩나물과 시금치를 다듬는 모습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는 살면서 단 한번도 음식을 해본 적이 없지만 아픈 아내를 위해 좋은 식재료로 건강 레시피를 개발하며 정성 가득한 음식을 만드는 남편 강창욱, 출판사 대표이자 이혼을 앞두고 말기 암을 선고 받은 아내 정다정, 그리고 오랫동안 따로 살던 아버지가 다시 돌아와 요리를 하는 모습이 싫기만 한 고3 아들이 주인공이다.
음식을 만드는 감각과 느낌을 기록해두고 싶어서 블로그를 쓰는 강창욱이 지닌 차분함이 더 없이 좋다. 억지 눈물을 짜내지 않는 담담한 정다정에게 마음이 더 쓰인다. 창욱이 자주 가는 마트 사장의 요리 훈수는 매 회 웃음 포인트였다. 유머 넘치는 마트 사장이 동네에 있다면 왠지 부엌과 친하지 않은 초보에게도 요리에 자신감이 붙을 것 같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12개 에피소드로 구성된 쇼트폼 형식의 웹 드라마다. 에피소드마다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제목과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마다 마음에 와닿는 대사가 각기 다른 것이 특징이다. 물론 주인공인 강창욱 작가가 블로그에 쓰는 부엌 일기 속 외우고 싶은 문장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제1화 잡채의 눈물은 책과 똑같이 “콩나물과 시금치나물, 이 둘이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로 시작한다. 출판계 동지이자 30년을 함께 산 아내가 암에 걸리자 부엌일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강창래 작가는 부엌에서 칼을 잡는다. 어떤 음식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는 아내가 그나마 입에 대는 거라곤 남편이 마음을 다해 만든 요리 뿐. 인문학자인 강창래 작가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우아한 문장에 담긴 일상 음식 60여 가지의 레서피와 ‘요리하는 마음’으로 독자들을 사로 잡은 책이다. 출판사 서평을 인용하자면 ‘책에 등장하는 메뉴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 집에서 늘 먹는 밥과 반찬이지만 만들고 먹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작은 드라마가 늘 특별하다. 그런 요리가 60여 가지. 조리 방법과 과정을 자상히 그리고 있어 ‘오늘 뭐 먹지?’ 할 때 힌트를 얻거나 조리 참고서로 삼아도 무방할 정도지만, 요리 설명도 문학적으로 읽게 만드는 우아한 문장에 실린 ‘요리하는 마음’이 언제나 더 크게 와 닿는다‘는 사실이다.
제1화가 끝나자 “남편과 아내. 이 둘이 꼭 특별한 관계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익숙해서 사는 것일 수 있다”는 대사가 여운으로 남았다. 마트에서 창욱이 수원에게 한 대답 “몸에 좋은 맛이요.”도 좋았다. 잡채에 고기도 안 넣고 간장도 안 넣는 창욱이 만든 정체불명 잡채의 맛. 결국 ‘쥐똥고추’라는 비법으로 무염이라는 밍밍함을 이기는 매운맛을 내어 아내를 감동시켰지만.
제3하에서 “굴비하겠습니다!”가 등장한다. 창욱이 가르치는 작문 수업 학생들이 연말 선물로 “굴비하세요!”라는 메모가 든 굴비 세트를 건넨다. 언젠가 창욱이 수업에서 굴비라는 이름의 유래를 설명했는데 그걸 기억한 학생들이 왠지 달라진 선생을 위한 응원이었다. 그리고 창욱은 가족들을 위해 그냥 찌고 굽기만 해도 맛나는 보리 굴비를 만든다. 엄마의 암 투병을 알게 되어 침통해있는 아들에게 보리 굴비를 차린 식탁에서 창욱은 말한다. “굴비 먹고 다들 굴비 하자!” 그리고 설명을 덧붙인다. “굴할 굴, 아닐 비. 굴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올 한해 ‘굴비’의 각오를 단단히 하자. 굴하지 않고 나아가야 심신이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다.
<하은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