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100년 산책] 격동의 한국 현대사, 왜 내 꿈에 미리 나타났을까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나는 비교적 꿈을 많이 꾸는 셈이다. 생리적 반응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꿈.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꿈은 인간의 잠재의식이 시간제한을 받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나는 삶의 격동기를 치르면서 어떤 영감(靈感)으로서의 꿈도 경험해 온 것 같다. 25세 때, 해방과 더불어 15~16년 동안은 더욱 그랬다.

1945년 8월 14일 밤, 아무런 생각이나 소원도 없이 잠들었을 때였다.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진남포로 갔다. 넓은 바닷가에 중학생 때부터 나를 키워준 마우리(E M Mowry) 선교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는 엄청나게 큰 널판자로 지은 창고 두 개가 있었다. 목사님은 나를 이끌고 그 창고로 가 문을 열었다. 높은 창고 꼭대기까지 일본인 시신이 가득 차 있었다. 바닷물 때문이었을까. 시신은 모두 부풀어져 있었다. 놀라서 문을 닫고 다음 창고로 갔다. 그 창고 안에도 일본인의 시체가 가득 쌓여 있었다. 살펴보니까 대학 동창들의 시신도 끼어 있었다. 깜짝 놀란 우리는 창고 밖으로 나왔다. 온 세상이 조용했고 집들과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역사의 사건을 보여주기 위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꿈이었다. 다시 잠들었다.

동쪽 산 너머로 진 붉은 태양

새벽꿈이다. 역사의 저녁 같았다. 나는 한없이 넓은 들 한 모퉁이에서 소에 연장을 메우고 뒤따라 밭을 갈고 있었다. 큰 쟁반같이 붉은 태양이 서쪽이 아닌 동쪽 산 너머로 내려가고 있었다. 저 해가 지면 어둠이 찾아올 텐데, 한없이 넓은 이 땅을 어떻게 다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시간과 역사의 흐름이 정지된 듯싶었다.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아침에 부친에게 꿈 얘기를 했다. 생각에 잠겼던 부친이 “내가 네 나이였을 때 꿈이었다. 동쪽 산 위로 무수히 많은 작은 태양이 떠올라 온 세상에 가득 차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일본의 일장기가 세상을 가득히 메웠는데…. 혹시 무슨 소식이 있을지 모르겠다. 평양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날 낮 12시, 일본 천황의 방송이 전해졌다. “일본군은 무조건 항복하고, 전쟁은 끝난다”는 선포였다. 우리 민족에는 새 역사가 시작되었고, 나는 교육계에서 밭을 갈기 위해 긴 인생길을 출발하게 되었다.

1950년 정월 초하룻날, 새벽의 꿈이다. 어떤 소리의 예감에 놀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내가 들은 소리는 수없이 많은 군인이 중무장하고 넓은 길 남쪽으로 행진하는 발소리였다. 북쪽을 바라보았다. 군대 행렬이 한없이 길었다. 멀리 그 배후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나타나 보였는데, 소련의 스탈린 사진이었다. 나는 놀라서, ‘공산군’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군대의 모습이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체격과 군복이었다. 컴컴한 새벽 시간이었다.

6개월 후에 6·25가 발발했다. 그해 봄부터 북에서는 몇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군사행동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국지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고당 조만식을 남으로 보낼 테니까,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공산당 지도자 이주하·김삼룡과 교환하자는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군사력과 무기 종류 등을 점검했고, 평화를 가장한 인적 교환을 제안했다. 그리고 6월 25일에 전쟁이 발발했다. 나는 정초 새벽꿈이 연상되었기 때문에 26일 월요일에 봉직하던 중앙중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심형필 교장을 찾았다. 이번 군사행동은 틀림없는 전쟁이니까 학교에서 은행에 맡겨둔 적금을 찾아 3개월씩의 봉급을 선불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어차피 공산군에게 빼앗길 돈이기 때문이다.

심 교장은 생각에 잠겼다가 교주인 인촌(김성수)께서 허락해주실지 걱정했다. 나는 선불해 주었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심 교장의 얘기를 들은 인촌은 사리판단이 넓은 분이었다. 그렇게 중앙학교 교직원은 어려운 3개월을 편히 지낼 수 있었다. 3개월 후 서울이 탈환되었으니까. 나도 아내와 세 어린 것들을 서울에 남겨두고 부산까지 피난 갈 수 있었다.

1960년 4월 10일 밤, 꿈이었다. 한밤이었다. 그러나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빛은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혼자 서울시청 앞에서 광화문 네거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차량도 인적도 없고 시간과 역사도 만물과 함께 정지되어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 앞에 도달했을 때 충격적인 장면이 보였다. 네거리 한가운데 직사각형으로 땅이 패었고, 그 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십자가 모습 그대로 누워져 있었다. 가시관도 그대로였는데 순백의 시신 옆구리에서 선혈이 흘러내리는 듯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몸이 떨리고 있었다.

마산 앞바다서 발견된 김주열군 시신

다음날 11일에는 마산 고등학생들이 두 번째로 이승만 정권의 부정투표에 항의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첫 번 데모 때, 최루탄이 눈에 박혀 죽은 김주열군을 경찰이 바다에 버렸는데, 그 시신이 발견되면서 재발한 데모였다. 대구의 중고등학생들도 뒤를 이어 항의 데모에 동참했다. 4월 18일 저녁에는 고려대생들이 당시 국회의사당이었던 현 시의회 앞까지 행진했다가 돌아가는 도중에 자유당이 조종하는 깡패들에게 폭력습격을 받았다. 그 소식에 접한 서울 시내 모든 중고등학교와 대학생들은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4월 19일 데모가 전 서울 시내를 휩쓸게 되었다. 나는 연세대생들과 데모대에 동참하면서 보호 감독하는 일원이 되었다. 데모는 늦은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경무대 앞에서부터 발포 소리가 들려왔다. 서울역 앞에서도 마찬가지 사태가 벌어졌다. 부상당한 학생들은 병원으로 실려 가고, 선량한 학생들은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학생 218명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5일에는 교수들과 시민들까지 데모에 가담했고 27일에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막을 내렸다. 나는 지금도 4·19묘역에 가면 그 당시의 아픈 마음을 생생히 떠올리곤 한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100년산책#김형석#김형석연세대명예교수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