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문을 여는 몇 가지 열쇠>

                                       - 2021328/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줌강의 -강사 정찬열 수필가

 

 

< #1 > 문학이란 무엇인가

 

 

<#2> 문학은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

분노나 놀람, 슬픔 같은 감정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감정 자체로 글 속에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의 마지막 행을 읽은 후에 독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나야 한다. 분노는 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가슴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김현 평론가, ‘행복한 책 읽기인용 -

 

<#3> 문학의 핵심은 감동이다

* 모든 예술은 감동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 로댕 -

* 좋은 글이란 잘 쓰인 글이 아니라 읽고 나서 감동을 주는 글이다.

글도 훈련과 연습에 의해 어느 수준까지는 누구나 잘 쓸 수 있다. 그러나 감동을 주는 글은 드물다. 다소 투박하고 거칠더라도 과장됨 없이 진솔하고 꾸밈이 드러나지 않는 글이라야 비로소 읽는 이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어놓는다.

- ‘좋은 생각심사평에서 -

 

* 글쓰기란 독자의 가슴에 돌멩이 하나를 던지는 일이다.

* 글이 출렁거리게 하라

 

<#4> 글쓴이와 독자 사이에는 문장만 존재한다.

말은 소리의 크기나 음의 고저, 그리고 감정이 실리고, 몸짓도 가세하기 때문에 소통이 편리하다. 그렇지만 글은 독자가 그 글 속에 담겨 있는 내용만 가지고 이해하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5> 문학의 목적(기능) - 인간을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

 

<#6>

밤이 이슥하여 뒤뜰에 나갔더니 달빛이 환하다. 마른 가지 끝에 망울을 터뜨리는 매화꽃이 달빛아래 새침하다. 대보름이 엊그제였다는데 어느새 달이 많이 기울었다. 구름사이로 흐르는 달을 보면서 까마득한 옛일이 엊그제 일인 양 떠올랐다. .

정월 대보름을 쇠고 나면 농촌에선 딸막딸막 농사 준비를 시작했다. 농기구를 꺼내어 고치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미리 장만해 두느라 손길이 바빠졌다.

30여 년 전, 바로 요맘때쯤의 어느 영암장날. 중학교를 갓 졸업한 나는 집안 아재를 따라 영암장에 지게를 사러 나갔다. 버스 한 대 들어오지 않던 마을인지라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읍내까지 20리 길을 꼬박 걸었다.

지게전엔 지게들이 장터를 꽉 메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키가 작은 내 몸에 딱 맞는 지게는 없었다. “너맘 때는 옷이나 지게는 조끔 큰 것이 좋아야하는 아재 말씀을 따라 내 몸에 조금 헐렁한 지게를 샀다. 낫과 괭이 호미 등, 농기구 몇 개와 씨감자 한 포대를 사서 지게 위에 얹었다. 제법 묵직했다.

(지게를 지고 장터를 빠져 나오는데 아재의 말씀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새신발이나 새 옷이 닳아지고 낡아지면 비로소 몸에 맞게 되던 일이 생각나면서, 지게질을 하며 살아가야 할 세월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형편을 보아 고등학교 진학을 생각해보자는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지만, 그 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 몸이 지게에 맞게 되면 나는 또 어른용 지게를 사야하는가. 아재의 말씀이 운명처럼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 왔다.)

침울한 내 기분을 눈치 챘는지 아재는 국밥집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식당은 사람들로 붐볐다. 아재가 어떤 분에게 몸이 아파 고향에 내려와 있는 정선생 아들인데 지게를 사주려고 함께 왔다며 나를 소개했다. 꾸벅 인사를 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분의 눈길이 처연했다. 순대국을 한 그릇 먹는 동안, 아재는 미리 와 있던 동네 어른들과 어울려 막걸리 잔을 기분 좋게 들이켰다. 얼큰해진 그는 나더러 먼저 집에 가라고 했다.

지게를 지고 터벅터벅 집으로 혼자 돌아가는 길은 아침보다 훨씬 팍팍하고 멀었다. 등에 진 지게가 자꾸 뒤뚱거렸다. 지게와 몸이 따로 놀았다. 처음엔 견딜 만 했던 물건들이 시간이 갈수록 어깨를 짓눌러왔다. 지게 끈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길가 짚더미에서 지푸라기를 뽑아 둘둘 말아 어깨와 멜빵 사이에 끼웠더니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그도 잠깐, 집은 아직 멀었는데 짐은 무거워가기만 했다.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리고 이마에도 땀이 맺혔다. 조그만 녀석이 큰 지게를 지고 낑낑대며 걸어가는 모습이 우스웠던지 어떤 사람이 가볍게 웃으며 지나쳤다. 오가는 장꾼들도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갔다.

마침 쉴만한 곳이 보여 지게를 받쳐놓고 땀을 닦았다. 바로 그때, 친구가 내 앞에 멈추어 섰다. 중학을 함께 졸업한 친구였다. 친구의 아버지도 함께 섰다. 쑥스럽고 난처하고 당황스러웠다.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아버지와 함께 광주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친구와 함께 서 있던 그 잠깐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친구는 아버지를 따라 떠나고, 나는 지게를 짊어지고 타박타박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서러웠다.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지게를 내 팽개치고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우리 집 장남이었다. 눈물 때문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왔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는 해가 길게 내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등에 진 짐이 무거운 줄도 몰랐다. 터벅터벅 얼마를 걸었을까. 나는 우리 집 사립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집에 들어와 지게를 받쳐놓고 얼른 세수를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큰 소리로 어머니, 수건 좀 주세요소리치는데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 지게에서 짐을 내려놓을 때 거들어 주었는데 어디 가셨을까 하고 부엌에 들어가 보니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계셨다.

지게를 사 짊어지고 들어서는 나를 보고 설음이 복 받쳐 올랐던 것이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의 고왔던 손은 어느새 거칠 대로 거칠어져 나무껍질이 되어 있었다. 교육자의 부인으로 살아오면서 농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머니. 공부대신 아들에게 지게질을 시켜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또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 것인가. 눈물이 핑 돌았다.

뒤뜰 우물로 나와 대야에 물을 가득 퍼 담아 다시 세수를 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어머니, 아들 배고파요, 어서 밥 주세요소리쳤다. 밥상 위에 고봉밥이 담겨왔다. 내 밥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셨다. “하따 달이 참 징허게도 밝다 잉, 저 달도 찼다가 찌울었다 하지 안티야 안그 날도 오늘밤처럼 둥근 달이 우리 집 초가지붕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 정찬열, <지게 사오던 날> 전문 -

 

<#7>

산문은 논리에서 그 생명을 얻는다. 논리 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언어의 운용과 배치가 산문 쓰기의 기본이다.

수필을 산문 문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압축이나 서정을 통해 시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 너머에 내재하는 세계와 인간 존재의 보편성을 탐색하기 위한 논리적 언어 수행이다.

대상이나 경험을 해석하고 자아를 성찰하는 논리적 사유가 산문문학으로서 수필의 속성이다. 산문은 논리이고 내면적 자기 성찰의 체계이다.

 

<#8> 시와 산문의 경계는 어디인가

시는 은유의 소산이다. 시는 은유로서 존재할 뿐이다. 시가 은유의 옷을 입는 것은 한순간이다. 인생이 어느 한 순간에 전환되듯이 시도 은유라는 순간의 강을 건너야만이 시로서 존재할 수 있다. 산문이 설명이라면 시는 침묵이다. 그것도 은유의 침묵이다. 시와 산문의 경계에서 은유의 옷을 입는 자만이 저 연어처럼 힘차게 폭포를 뛰어넘어 시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정호승 시인, 시평 인용 >

 

- 시와 산문을 구별하는 것이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시는 시제 時制가 일정한 분할된 시간에 초점이 맞추어지거나 통시적 通時的인데 비하여 수필이나 소설은 자유로운 시제의 전개 또는 시간의 넘나듬이 가능하다. 더 나아가 시는 인과론에 얽매어 있지 않으나 소설이나 수필은 시보다는 훨씬 원인과 결과의 매듭이 분명하고, 사건 중심의 작가의 의도가 보다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한 가지 더 시와 산문을 구분 짓는 요소를 거론한다면 시의 기법은 비유에 의존하고 있으나 산문은 비유보다는 기승전결, 또는 서론 본론 결론과 같은 글의 구조에 따른 문체의 기법에 더 관점을 둔다는 것이다.

 

<#9>

좋은 수필을 쓰려면 시와 소설을 알아야 한다. 수필은 시가 주는 이미지의 새로움과 소설이 주는 서사의 참신함을 본받아야 한다. 수필은 시의 장점과 소설의 장점을 두루두루 잘 활용할 수 있는, 활용해야 하는 장르다.

시를 모르고서는 운율이 넘치는 글, 비유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글을 쓸 수가 없다. 생략, 함축, 도치, 언어의 전이 등, 시적 기법을 수필에 적절히 원용할 수도 없다.

소설을 알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있다. 또한 사물에 대한 묘사력, 인간 삶의 양태를 간접적으로 관찰하고 경험하고 이해하게 하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다. 고전을 가까이 하라. 그 속에 숨어있는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라.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과 삶을 사랑하라. 그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 글로 풀어내면 감동적인 수필을 쓸 수 있을 터이다.

수필은 개성의 문학이다. 시는 이미지를 창조하고, 소설은 서사를 창조한다. 수필은 시와 수필의 장점은 물론 평론, 철학까지도 원용할 수 있다. 이것들을 이용하여 수필가는 자기만의 색깔을 만들어 낸다. 자신이 가진 인격, 인생관, 역사관, 등을 바탕으로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개성적인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다.

 

<#10> 문학에 있어서의 상상력

- 수필에 있어서 상상력 - 시 소설과 다른 상상력의 한계

 

... 문학이란 하나의 주제를 향하여 자르고 보태서 하나의 그릇을 만드는 도공의 작업이다. 더욱이 상상이란 그 자체가 허구와 이웃사촌이다. 그런데 상상 없이 어떻게 문학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 문학은 어디까지나 상상력의 소산이며 공상에 대한 현실화다. 문학에서 허구란 말은 거짓말이라기보다는 꾸며낸 이야기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기에 어떤 진실이 존재하면 된다. 그 진실이란 다른 말로 문학적 진실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문학적 진실이란 인생에 있어서 어떤 메시지를 말한다.

- 정창교, ‘ 새로운 이론이 정립되어야중에서 -

 

 

<#11> 예술은 설명이 아니고 감동이지요. 감동은 일상에서 옵니다. ‘일상의 존중을 모르는 예술작품들은 억지지요. 일상의 재구성을 통한 긴장된 새로운 세계의 창조가 예술일 때 공감을 넘어선 감동이 일지요.

-김용택 시인, 한겨레신문 연제 글에서 -

 

<#12>

산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결국 문체다. 산문은 살아온 만큼, 사유한 만큼, 갈고 닦은 만큼의 수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분야다. 자신만을 앞세워 소통하지 못하는 문장은 문장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는 작품도 또한 작품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이 문학의 기능이고, 문인의 기능이고, 인생의 기능이가 때문이다.

글쓴이와 독자는 무엇에 의해 연결 되는가. 문장이다. 문맥이 어떠해야 하는가, 다음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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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문학적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그 문맥입니다.

문맥은 흔히 사람의 혈맥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혈맥의 혈액순환이 활발해야 사람이 건강하듯이 문장은 문맥의 순환이 건전해야 문세文勢와 문정文情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필의 평가는 그 문맥형식의 이상 여부를 감정하게 됩니다.

단적으로 문맥文脈은 감정의 줄기를 말합니다. 일관된 문맥이 없으면 문리文理가 통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필에 있어서는 정서의 면면함이 물줄기와 같아야합니다. 가령 필요 없는 말이 중간에 끼게 되면 문맥이 막히고, 있어야 할 말이 빠지면 문맥이 끊기어지고, 강한 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약한 말이 오면 문맥이 시들고, 약한 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강한 말이 오면 문맥에 옹이가 생깁니다.

또한 직서直敍해야 할 때 필요 없이 우회하면 문맥이 혼미하고, 완곡하게 표현해야 할 곳을 직접 서술하면 문맥이 강박해지고, 줄기가 다른 말이 병행하면 갈라져서 문맥을 이루지 못합니다. 문맥의 순서가 바뀌거나 필연성이 결여되면 문장이 긴밀성을 잃거나 전체의 효과를 상실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문맥이란 글을 짜 들어가는 위치와 순서에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필을 쓸 때에는 무엇보다도 문맥의 흐름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효자 교수. 수필작가/ 미주문학 05년 가을호 수필 작품평, 인용 >

 

 

<#13>문학의 진정한 스승은 문학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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