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죽 / 지영미 - 2023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수직으로 곧게 뻗은 대나무 군락, 속을 비운 대들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흘러넘치는 푸르른 본능 사이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댓잎에 튕긴 빛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인다. 바람이 불자 일제히 우듬지를 출렁이며 허공에 부서진 소리를 쓸어 담는다.
대나무들은 하룻밤에도 훌쩍 키가 자란다. 늦게서야 자라는 대는 죽죽 뻗고 싶지만, 햇볕은 먼저 큰 친구들이 차지한다. 시간이 갈수록 초라한 모습이 도드라진다. 버스럭거리는 낙엽만이 골골이 파인 상처를 감싸줄 뿐이다. 속 깊은 자괴감에 비하면 겉면을 타고 내리는 고통쯤은 참을만하다. 제때 자라지 못한 몸뚱이는 결핍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다. 시간이 갈수록 마디를 파고드는 골이 깊어진다. 생장의 마디마다 사연을 간직한 채 낮은 자세로 사는 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골이 깊어진 대나무, 골죽은 위로 자라는 대신 속을 채운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후미진 곳이지만 그것도 하나의 삶이기에 야무지게 제 속을 키운다. 속살은 두텁게 불리고 겉은 단단하게 여민다. 눈을 늦게 떠 늦자란 죄, 뭉툭하고 못생긴 자신의 모습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모두가 속을 비우는 대숲에서 내면을 옹골지게 키우며 자신을 지킨다.
잘 자란 대나무들은 진작 주인의 눈에 들었다. 살을 얇게 저민 고운 합죽선이 무용수의 손에서 나붓거리고, 매끈한 대는 실팍한 붓대가 되어 명필의 손에서 일필휘지 一筆揮之로 명문장을 휘갈긴다. 성글게 엮은 죽부인은 한여름 밤 어느 여염집 주인의 품에 든다. 숲을 떠나는 튼실한 대나무들을 보면서, 골죽은 소박한 국숫집 채반이라도 꿈꾸지만, 이마저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들 잘려나간 자리에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숨죽인 대들이 뿌리를 드러내고 주검처럼 누웠다. 남은 녀석들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 두려움보다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골죽에게 찾아들었다. 이제야 햇볕을 흠뻑 받고 달빛을 마시지만, 몸을 바꾸기에는 이미 늦었다. 서러워 울고 싶어도 누가 건들어 주지 않는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휘이잉 속울음을 운다.
대숲을 흔드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온다. 노인이 대숲을 이리저리 살핀다. 숲을 헤집는 낫이 달빛에 번득인다. 이놈은 너무 굵고, 저놈은 가늘어서 안 되고, 골 깊은 대나무를 응시한다. 저놈이 쓸 만하군. 온 힘을 다해 한 몸으로 엮어진 골죽을 뿌리째 뽑아낸다. 매서운 눈으로 골의 형상과 속살의 두께를 가늠한 노인이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이윽고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불길로 병골죽의 겉면을 이리저리 굽는다. 은근한 불에 시퍼런 거죽이 거뭇해지다가 누렇게 변한다. 지지고 펴고 뿌리는 물세례에 허연 연기가 허공에 솟구친다. 우두둑 철심이 속살을 휘젓는다. 푹 파인 속심 사이로 소금기가 흘러든다. 베이고 파이고 골 죽은 만신창이가 된다. 저릿한 아픔이 전신을 파고든다. 죄라고는 기형으로 자란 것밖에 없다. 그런데 몸을 참하는 형이라니, 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면 필시 다른 이유가 있을 터이다. 툭, 한순간 골죽은 컴컴한 방 한쪽에 놓인다. 골방에서 세월을 곰 삭인다.
골죽의 머리가 명인의 어깨에 살포시 얹힌다. 곧게 편 왼팔과 약간 낮게 드리운 오른팔이 대금을 수평으로 받쳐 든다. 취구를 따라 당겼다 늘렸다 입술에 주름을 편다. 입김이 소리 구멍으로 들어간다.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이윽고 골죽은 명기名器가 된다.
후루루 휘리리 후루후루 휘리리
명인의 날숨을 마신 대금이 첫울음을 토해낸다. 숱한 기다림과 번민의 시간이 진양조장단으로 흘러나온다. 속울음이 심금을 흔든다. 취구에 불어 넣은 입김이 끊어질 듯 말 듯 사그라들다가 중모리에 이르면 다시 굵고 길게 살아난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꽁지를 터는 새처럼 파르르 떤다. 혀를 굴리다가 튕기고 막았다가 떼고 들숨과 날숨의 어우러짐이 절창 絶唱에 이른다. 명인의 기교에 음정은 자진모리장단으로 거듭난다.
청의 떨림에 바람이 지나가고 달빛이 아른거린다. 시조를 읊조리듯 감은 눈이 움찔거린다. 장구 소리가 추임새를 넣자 입술과 어깨가 파도를 탄다. 토해내지 못한 설움이 입김을 타고 나오자 절로 손가락이 춤을 춘다. 골마다 묻어 두었던 통한과 비명이 파문을 일으킨다. 불의 다스림을 무수히 견딘 고통의 비틀림이 신비로운 가락으로 풀려난다. 떨고 흘리고 꺾고, 다시 혀를 치는 모든 기교에, 억눌렸던 고통이 대금의 골을 타고 승화한다.
소리 내어 우는 것은 가슴 깊숙한 곳에 정한 情恨을 품었기 때문이다. 가락도 외침도 하물며 비명까지, 맺힌 것이 있어야 밖으로 새어 나온다. 무른 나무에서는 좋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고생에 고생을 거듭한 나무라야 딴딴한 소리가 난다. 숱한 역경을 이겨낸 사람의 울음이 영혼을 울리듯, 울 줄 아는 나무 한 그루가 대신 울어주는 악기가 된다.
깊은 한이 담긴 저릿한 소리는 문득 슬퍼지기도, 이내 비장해지기도 한다. 너울거리는 선율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밑바닥을 훑는다. 깊은 골짜기 눈 쌓인 언덕, 사람 발길이 뜸한 산자락까지 휘감아 돈다. 침묵이 필생의 업인 바위, 태풍에 가지가 부러진 나무, 아파도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미물들을 쓰다듬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며 가슴에 구멍이 뚫려, 공허에 빠져본 사람이라야 제대로 울줄 안다. 심연 深淵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절절함으로 삼라만상의 아픈 것들을 보듬는다.
다시 맑고 청아한 음색이 울린다. 대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가 사뭇 비장하다. 교교한 달빛이 만상 萬象에 내린다.
-당선소감
매서운 바람에 눈발까지 흩날리는 날 낭보를 받았습니다. 전화 속 목소리에 몸속 깊숙한 곳이 온기로 그득 해졌습니다.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세월의 보상이며, 보이지 않는 글을 잡아보려 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일과 글쓰기 사이에서 글만 파고들 수 없는, 무의식 저 너머의 불안을 말끔하게 씻어주었습니다.
치유로 시작한 글이 바닥을 보이며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했습니다. 또 다른 도약을 위한 목표물이 필요했습니다. 신춘문예를 생각하면 마음이 부듯해졌습니다. 해마다 수상작과 심사평을 읽어가며 혼자만의 방을 키웠습니다.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으면 깃발이 펄럭이는 방을 꿈꾸었습니다.
집 맞은편 대나무 숲의 소리가 유난히 맑게 들립니다. 쓸모없는 병든 대나무가 자신의 결핍을 발판으로 인고의 세월을 감내하고 명기가 됩니다. 삼라만상의 아픈 것들을 보듬는 과정을 함께 아파하고 지켜보는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저의 글이 누군가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상쇄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글쓰기는 자신을 이겨내야 하는 혼자만의 싸움입니다. 누구도 함께 해주지도 않지만, 한편의 글을 해산한 후에 찾아오는 희열이 언제나 저를 추동합니다. 저의 글을 낙점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문우들이 있어 글살이의 고난과 보람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의 발자국마다 이끌어 주신 모든 분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오래도록 같이하고 싶습니다. 전북일보에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수필은 삶의 경지이고 깨달음에 닿아있기에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응모 작품에서 인생과 마음의 경지를 보면서 체험을 통한 발견과 의미를 살펴본다. 작품 5편을 가려내어 다시 읽어 보았다.
수필은 다른 장르와는 달리 자신의 삶을 피워내는 작업이고, 삶의 경지와 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응모 작품 중 두 편을 골랐다. ‘골죽’과 ‘옹이’이다. 제목 자체가 궁금하기도 했다, ‘골죽’은 골이 깊어진 대나무, 위로 자라는 대신 속을 채우는 대나무를 말한다. 골죽이 불기운과 물과 철심으로 다듬어져 대금으로 탄생한다. 오랜 고통과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취구에 입김이 닿으면 중모리, 자진모리, 진양조장단의 가락으로 심금을 울리는 악기로 재탄생한다. 인간의 자각은 삶의 발견에서 얻어지는 깨달음일 것이다. ‘골죽’을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나무의 옹이는 줄기가 견뎌 온 인고의 흔적이다. 바람에 가지가 부러지고 그루터기 상처를 입어 몸부림을 친다. 새 살이 돋은 것이 바로 옹이다. 인생도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더 단단히 꿈을 안고 옹이가 박혔을 테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리며 건승,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정목일 수필가
출처- 전북일보 인터넷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