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깃발을 내리고

 


성민희

 

 편견의 깃발을 내리고

 

성민희

 

신문을 펼칠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광고가 있다. 모 결혼상담소의 광고다. ‘한국 며느리, 한국 사위, 믿을 수 있는 oo에서 인연을 만드세요.’ 픽 웃음이 나온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광고를 하는지 모르겠다. 단일민족 운운하며 외국인과의 결혼에 배타적이던 한국에도 다문화가정이라는 단어가 생겼는데 인종 전시장인 미국에서 한국 사람을 고집하다니.

 

지난 달 부부 동반 모임이 있었다. 시간이 가며 자연스레 자녀 이야기가 나왔다. 대화를 나누어보니 아이들의 배우자는 모두 외국인이었다. 변호사 딸을 가진 사람은 히스패닉 변호사를 사위로 맞이했고, 의사 아들은 유태인 의사 며느리를, 의류 디자이너 딸은 백인 회사원 사위를, 약사인 아들은 필리핀 교사 며느리를 맞이했다. 나 역시 변호사인 딸이 대만계 변호사와 결혼했다. 그들은 모두 자녀를 낳고 사랑으로 잘 여문 가정을 꾸려 바라보는 부모 마음이 행복하다고 했다.

 

퓨 리서치(Pew Research)2012년 통계에 의하면 미주 교포의 2, 3세 중 약 1/3은 다른 인종과 결혼한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모의 품 안에 있을 때에야 당연히 한국 사람과 교류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다양한 사람과 섞일 수밖에 없다. 부모와 함께 비즈니스를 하거나, 한인 상대의 사업을 한다면 한국 사람과의 교제가 일상이겠지만 주류사회에서 활동하는 아이는 그럴 기회가 없다. 더구나 동료로서 함께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타인종이라는 인식이 전혀 들지 않는다. 아니 어릴 때부터 그에 대한 편견이 아예 없었다. 인권과 평등이 기본인 미국의 교육도 한 몫을 했겠지만 더듬더듬 말을 할 때부터 함께 공부하고 먹고 뛰어놀던 친구에게서 어떤 이질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아이를 키울 때는 백인친구든 흑인친구든 상관없이 반갑게 맞이하지 않으면 큰일이 났다. 조금이라도 호기심 어린 표정이나 언사가 비친 날은 무식하고 저급한 엄마로 낙인이 찍혀 며칠 동안 눈홀김을 당해야했다.

친지 중에 백인 사위를 맞이한 분이 있다. 아기를 갖지 못한 딸과 사위가 입양을 했는데 히스패닉 아기였다. 백인 아빠에 동양인 엄마. 그리고 히스패닉 자녀라니. 가족의 구성이 너무 복잡해서 아기를 처음 대하는 날 반갑게 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딸 부부는 어머니의 의식구조에 실망 했다며 저녁도 먹지 않고 가 버렸다고 했다.

 

한국 사위를 데려와야 한다며 유난을 떨던 친구 남편에게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사위하고 마주 앉아 크으윽, 막걸리 한 잔 하고 싶어서요.” 농담 같이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딸 둘만 키운 아버지로서 말도 통하고 정서도 통하는 한국 사위를 아들처럼 거느리고 싶은 마음이 이해는 되었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그게 아니다. 한국의 친구도 세대 차이 때문에 자녀와 대화가 힘들다는데 영어권 아이를 붙잡고 어찌 막걸리 한 잔 공상(?)을 하는지 우리는 꿈을 깨라며 핀잔을 주었다. 세대 차이에 더하여 문화 차이와 언어 소통의 어려움까지 있는 미국이 아닌가. 동양 아이에게 바나나란 별명이 왜 붙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벌써 8년 전이 되었다. 딸이 사윗감을 처음 데리고 왔을 때는 반겨지지 않았다. 나 역시 한국 사위를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위의 딸에 대한 사랑은 우선 접어두고라도 이런저런 조건을 재어보면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해야 했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속앓이를 며칠 하고 나니 옛날 생각이 났다. 나도 난생처음 설레었던 남자를 포기해야했던 때가 있었다. 부모님은 서울사람이라는 이유로 반대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어이없는 반대였지만 사위나 며느리는 무조건 경상도 사람이라야 했던 그때의 내 부모 세대에게는 심각한 이슈였다. 작은 손바닥 안에서 전 세계와 소통을 하는 이 글로벌 시대에 인종이나 국적을 따지는 것이나, 그 시절에 경상도 전라도 서울 등 지방을 따지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언가 하는 깨달음이 왔다. 나도 세상에 어두운 부모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쁘게 허락해 주었다. 그것이 얼마나 잘한 결정이었는지 세월이 갈수록 느껴진다.

 

부모가 아무리 현명하고 완강해도 장성한 자녀의 삶을 리더할 수는 없다. 아니 리더를 해서도 안 된다. 그저 울타리가 되어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그들의 선택을 축복해 줄 뿐 아무 것도 강요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한국 며느리, 한국 사위를 찾아준다는 결혼상담소의 광고에 솔깃하는 부모라면 한번쯤 자녀의 직장을 견학을 해 보기를 권한다. 멜팅팟 지구촌을 발아래에 딛고 싱싱한 가지를 벋어 올리는 자녀에게 청량한 물을 부어주지는 못 할망정 족쇄를 채워서야 되겠는가.


<대구일보> 6/28/2018 <문학세계>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