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룽지의 길

남편이 속탈이 났다. 지난해 사다리에서 낙상해 척추에 금 3개 짊어지고 산다. 몸 운동을 삼가다 하는 수 없이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엄두를 못 내던 거였다. 이웃 젊은 친구 부부가 동행해 줘서 가능했다. 새벽 6시 출발 집에 돌아오면 정오에 가깝다. 어느 듯 보행에 힘이 실리고 어느 정도 속탈도 진정됐다. 그 동안 누룽지로 속을 달래곤 했는데 이제는 밥맛도 나고 밤에 잠도 잘 잔다. 나까지 몸도 마음도 개운해진 걸 느낀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등산을 택하지 않고 얼바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큰집 형님이 누룽지 가져가라고 하신지 꽤 되었다. 속탈이 났을 때 바로 가서 누룽지를 받아왔어야 했는데, 당장 운전기사가 몸이 안 좋으니 그렇게 안 됐다.

안 그래도 못 찾아 뵌 게 부담이 되어 병문안을 벼르던 참이었다. 남편이 죽으로, 누룽지로 속을 달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큰 형님은 쇠침을 박은 그 무릎으로 쌀 한 자루 다 누룽지 만드셨다고 한다. 준비해 놓은 누룽지 가지고 가라는 전갈을 받았을 때 눈물이 핑, 그저 황송하고 고마움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을 미룰 수가 없었다. 누룽지 제조과정 소식 듣고 더 감동받은 쪽은 남편이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공 드린 10시간은 기도처럼 완전 헌신이었고 아름다운 몰두였다.

큰집 좁다란 부엌에 쭉 서 계셨던 큰 형님을 뵙는 일, 참으로 잘한 방문이었다. 요술방망이가 휘젓는 듯 큰집 부엌은 늘 경이로운 바람이 불었다. 항상 큰형님 손끝 음식 맛은 여러 사람들을 불러들였고 행복하게 해주었다. 해마다 큰댁에서 차리는 설날 떡국상차림은 김씨 가문의 전통이며 가풍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 이타의 손맛이 딸들과 며느리들에게로 이어진 것, 진정 긍지이고 축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외아들 남편은 친 형이 없다. 젊었을 때부터 친아우처럼 잘 대해주시는 사촌 큰형님을 많이 의지하고 가깝게 지내왔다고 한다. 남편이 유난히 따르는 사촌형수는 무릎 수술 후 몇 달을 리햅 치료를 받으시다가 이제 겨우 지팡이와 동무해 걸으신다. 그런 처지에 부엌에 그토록 오래 서 계시게 한 것을 생각하면 죄송스러움에 가슴이 찡해왔다. 그 뿐인가 손수 말려 만드신 무말랭이 쪼글락지, 친구텃밭에서 따온 깻잎김치 모두가 무공해, 친환경밥상이다. 날 고등어를 소금에 절여 냉동시켜 사이사이에 종이 칸막이로 싼 자반고등어, 뭐니뭐니해도 누룽지는 남편 입맛 살리는 일등공신 이었다. 그 당시 병원에서도 알아내지 못하는 남편의 속탈은 스트레스라는 난해한 신경문제였다.

남편의 삼식은 주로 누룽지, 죽, 국이다. 양방을 거쳐 한방으로 속을 달래고 있는 중에 확실히 산행은 운동차원에서 도움이 되었고 큰집의 누룽지 선물은 형수님의 사랑이어서 도움이 되었다. 관심이었다. 몇 개월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고아처럼 허전한 남편은 우울증 비슷한 증세에 빠져갔다. 자꾸 꿈속에 나타나는 어머니, 질긴 인연을 보듬고 계시는 것 같았다. 큰 댁 형수님이 마련해주신 누룽지는 어머니를 만나는 그리움이 아니었나 싶었다.

‘누룽지’를 영어로 밥이 부라운 (Bobby Brown)라고 하는 넌쎈스 퀴즈답이 기억난다. 그렇구나! 밥이 타서 어른 상에 못 올라가는 이밥, 그 밥이 타버렸다는 그 부정적 상황을 누룽지라는 긍정의 문화로 창출한 지혜, 식생활의 주된 밥이 타서 밥의 자격실격, 딱딱하게 타 버린 쌀밥, 가마솥 밑바닥에서 밥이 타서 버리게 된 그 절망적 부정을 누룽지라는 긍정의 밥상문화로 만들어 낸 조상들의 슬기, 통쾌한 것으로 말하자면 기가 찰 노릇이다. 지난봄에 방문한 남이섬에는 쓰레기가 없었다. 재활용 천국이다. 맥주병으로 집을 만들고 녹 슬은 포탄을 녹여 사랑의 종을 만들어 교회 새벽종, 총알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는 헬멧을 두레박으로 바꿔 생수를 퍼 나르는 아름다운 재활용 업은 국외에 사는 나를 놀래키는 데 충분했다. 남이섬은 리사이클 문화, 바로 긍정의 문화 천국임이 자랑스러웠다.

내가 만난 누룽지는 오늘도 행복한 사랑의 길을 가고 있다. 줄에 매단 빈 깡통이 뒤따르고 있는 남이섬을 떠올리며 냄비에 물을 붓고 물 끓기를 기다린다. 끓으면 누룽지 두서너 쪽을 넣고 일단 뚜껑을 닫으라는 긍정의 누룽지 레시피- 사람의 허기를 채우고 뱃속을 대펴 탈이 난 속을 달래는 행복한 건강에 길을 가는 누룽지, 앞장서서 누룽지 예찬 운동을 펼칠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