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선물
천하가 생명 푸른 4월이었다. 선물이란 것이 묘해서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양쪽 다 행복해 지는 게 신기했다. 그 무렵 불면증 때문에 속상할 정도로 힘들어 하고 있었다. 생일 선물이라며 전해 받은 것은 커다란 액자의 사진 한 폭이었다. 사진틀은 뒷좌석에 간신이 실릴 정도로 컸다. 아픈 사람의 생일이랍시고 준비해준 마음이 나를 감동시켰다. 자장가처럼 볼 적마다 내 마음은 편안해지고 평화로운 목가적 풍경이 포대기가 되어 나를 감싸 안아 리랙스 시켜주곤 했다.
정성을 다해 훼밀리룸 벽난로 위 넓은 벽에 규격을 맞춰 정성스레 걸었고 하루에도 수십 번 눈길을 가져가는 지점이라 안성맞춤의 적소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체 인내를 가지고 주인의 처사만 기다려온 나의 빈 벽이었다.
사진작가 성진일집사가 멕시코 선교지에 갔을 때 찍은 농촌 풍경이다. 지고의 평화스러움과 아름다움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파아란 하늘 보자기에 하얀 뭉게구름 몇 덩어리씩 구석에 흩터져 있다. 그 아래 일렬로 선 미류 나무의 초록 이파리들은 눈부시게 반짝이고 윤기가 음악처럼 흐르고 있다. 나무둥치 밑으로 넓게 열어놓은 들판, 거기엔 누런 들풀들이 낮게 엎드려 한 방향으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나름대로 제 각기 꼭 알맞는 지점에서 서로 사랑의 시선을 나눌 수 있는 상생의 간격으로 서있는 게 무척 다정해 보인다. 사진은 그 들판의 나무그늘로 나를 데리고 들어간다. 어느 사이에 나는 전원 풍경이 된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든 극치의 조화와 균형은 풍경 구석구석에 숨어있다. 몸을 낮추니 세상에 아름답지 않는 게 없다는 사진작가의 겸손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자연이 재발견되고 발췌되고 축소되는 사진예술, 그리고 자연은 또다시 무한대로 확대되고 의미로 펼쳐진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 에서 응시하는 시선들을 감동으로 이어주고 생명의 호흡을 전이시키는 것이다. 비우면서 가득 채우는 작업, 그래서 사진사와 사진작가의 차이점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시선을 뗄 수 없이 빨려 들어가 여기의 나는 없고 그 풍경 속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상에의 회복, 그 의미를 증폭시키는 그 힘은 사진작가의 몫이었다. 떨리는 감격과 기쁨은 감성을 물오르게 했다. 감사함이 근저를 이루어 바탕화면이 되었다. 풍경의 한 부분이 된 나, 정작 가득 차오름을 체험한 기억은 참으로 뿌듯하고 소중한 것으로 남아있다.
문득 걱정을 내려놓고 누군가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여 방황하던 젊은 날의 들판이 떠 올랐다. 내 안의 상처들을 말끔히 아물도록 어루만져 주는 저 산들 바람과 밤하늘의 별들, 고뇌의 들판은 사라지고 사막을 건너 온 이제 물기 머금은 바람 앞에 나는 자꾸 작아지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온전한 의탁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입맛이 서서히 돌아오고 아픔이 줄어들면서 손바닥에 와서 고이는 힘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물을 마시며 몸 구석구석 물끼가 스며들었다. 마른 뼈들이 촉촉해지면서 부딪히며 눈 흘기다가 이제는 서로를 세워주었다. 내 골수 깊이 디엔에이(DNA)가 살아나고 있다는 감이 왔다. 세포와 교신하면서 함생으로 달려가는 체험, 참으로 경이롭게 느껴졌던 일이 어제만 같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나의 시선을 맨 먼저 가져가는 저 풍경사진, 소매 끝의 팽팽한 긴장을 풀어주려고 주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나는 안다. 금방 막힘이 뚫리고 툭 트인다. 오늘은 어릴 적 고향이 어느새 가슴에 와 안긴다. 가족과 둘러앉은 따끈한 둥근 밥상이 겹치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던 그 시간에 젖어든다.
그 사진액자 생일선물은 엄청난 힐링 파워를 공급해 주었다. 사진은 정지해있는데 움직이고 살아있는 자연은 생명을 펌프질하며 나를 살리는 힐링 데라피 작업을 하고 있었다. 호흡처럼 반복되는 에너지 공급처가 평면 사진 한 장이 었다면 사람들은 웃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 내제해 있는 힘, 솟아나 주고 받으며 해 내는 치유의 메카니즘이 지극히 신비롭기만 했다. 지금 부터는 남은 나의 날들이 매일 매일이 생일이니 기가 찰 노릇 아닌가. 불면증이 어느 틈엔가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7-26-2020 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