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이 증명하는 시간

 

                                                                                                                              김윤희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레돈도 비치 해변을 걷는다. 물결은 매번 다른 얼굴로 다가오고, 그때마다 나도 조금씩 달라진다. 발끝에 닿는 모래의 감촉과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걸음마다 밀려든다.

 

  나는 산을 오르는 것보다 바닷가를 거닐며 마음을 달래는 시간을 좋아한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멋모르고 올랐던 한라산에서 갑작스러운 폭우를 만나 숨이 턱까지 차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어딘가에 서늘하게 남아 있다. 뒤로 산은 가까이 다가가기보다 걸음 떨어져 바라볼 편안한 풍경이 되었다.

 

  그런 내가 얼마 , 등산을 즐기는 지인의 권유로 산행팀에 합류했다. 걷던 평탄한 길과는 달리, 어디서 오르막이 시작될지 모르는 산길은 낯선 긴장과 묘한 설렘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미국에서 처음 나서는 산행이라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팀을 이끄는 리더의 손길은 의외로 세심했다. 기온 변화에 대비한 재킷과 등산 스틱, 간식까지 하나하나 챙겨 건넸다. 안전수칙을 들은 산속으로 발을 들이자,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와 발밑의 낙엽 바스락거림, 멀리서 번져오는 새들의 지저귐이 마치 산이 먼저 말을 거는 듯했다.

 

  초입부터 좁고 비탈진 돌길이 이어진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호흡은 짧아지고, 다리는 점점 무거워진다. 평지에 길들여진 근육들이 낯선 산길과 가파른 경사 앞에서 놀란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보니 도시가 한눈에 펼쳐진다. 산허리를 따라 이어진 풍경 속에서 어느새 높은 곳까지 올라와 있음을 실감한다. 번이나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밀려왔지만, 일행의 발걸음에 뒤처질까 거친 숨을 삼키며 다시 몸을 일으킨다.

 

  묵묵히 발을 내딛다 보니 어느 순간 하늘이 열리고 공기가 달라졌다. 아득하기만 했던 정상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마지막 걸음은 몸보다 마음이 버텨야 하는 시간이다. 숨은 가빠지고 심장은 귓가를 두드리듯 요란하게 뛴다. 그때, 한참 뒤에서 따라오던 다른 팀이 어느새 우리를 스치듯 앞질러 간다.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는 그들의 발걸음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긴장을 삼킨다.

 

마침내 정상에 섰다. 먼저 도착한 이들과 뒤섞인 그곳은 웃음과 환호로 가득하다. 처음 만난 얼굴들이지만 같은 높이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묘한 온기가 번진다. 하늘은 손에 닿을 낮게 내려와 있고, 멀리 내려다본 도심의 건물들은 손바닥 모형처럼 작아 보인다. 우리는 사진을 찍고야호!” 외친다. 숨이 풀리듯 터져 나오는 순간, 전체가 서서히 이완된다.

 

  그때였다. 시선이 한쪽에 멈췄다. 우리를 스쳐 지나간 이들은 은빛 머리의 시니어들이었다. 그중 가장 연세가 많은 분이 여든여섯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같은 길을 걸어 올라온 사람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그들의 걸음은 가벼웠다. 사람들은 흔히 나이를 숫자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설명 없이 그것을 넘어선다. 오래 시간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몸에 남는다는 것을 그들의 발걸음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제야 보였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은 속도로 흐르지만, 위에 어떤 선택을 쌓아왔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하루하루의 습관이 결국 사람의 방향이 되고, 방향이 삶의 결을 만든다.

  미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늘의 걸음 속에 섞여 있다. 그것은 이름도 없이, 이미 걸음 옆을 함께 지나고 있었다.

 

 

        중앙일보 [이아침에] 05/16/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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