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루비반지
신순희
엄마의 결혼반지는 루비다. 만주에서 살던 아버지와 결혼한 엄마가 받은 그 반지는 길쭉한 팔각형이다. 누런 금에 물린 루비는 붉은색이 진했다. 엄마가 반지를 매일 낀 건 아니었다. 곱게 한복을 갈아입고 외출할 때 그 반지를 꼈다. 보통은 서랍 안에 반지가 있었다. 그것을 엄마 몰래 한 번씩 내 손가락에 끼어봤다. 어린 나에게 반지는 너무 커서 빙빙 돌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정확히 내가 몇 살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열두 살쯤 되었을까. 어느 날 엄마는 빨래하다 반지를 빨래판에 문질렀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은근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진짜는 그렇게 해도 상처 나지 않는다고 했다. 반지는 흠이 생기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 반지가 좋았다. 나는 여태껏 엄마 반지만큼 큰 루비반지를 보지 못했다.
“엄마 반지 참 예쁘다. 엄마, 그 반지 나중에 나한테 물려줘.”
내 말에 엄마는 반지 알을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만주에서 샀다는데, 나는 이 반지밖에 없다.”
엄마의 보석은 그것밖에 없었다. 나중에 언니가 엄마에게 오팔이나 비취반지 세트도 사드리고 했지만 어떤 화려한 반지도 그 루비반지만 못했다. 그 반지를 탐낸 딸은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엄마는 결국 그 반지를 언니에게 물려주었다. 큰딸이고 엄마에게 모든 면으로 잘했으니 당연했지만,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
엄마 반지는, 단순한 세팅이 고전적인 느낌이랄까, 품위가 있었다. 품질 좋은 루비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큰 루비 알을 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투명한 붉은색이 평범하지 않았다. 핏빛처럼 붉었다. 엄마의 마디 굵은 손가락에 끼여진 루비반지는, 나에겐 엄마의 상징이었다. 그 반지가 진짜이든 가짜이든 상관없다. 엄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표상, 그것을 갖고 싶었다.
반지를 물려받은 언니네 집에 도둑이 들었다. 집을 비우는 시간을 알고 침입한 도둑은 온통 집안을 획 뒤집어 놓았다. 언니의 패물은 물론, 돈 되는 것은 모두 털어갔다. 내 마음을 덜컥하게 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갖고 싶어 했지만, 언니에게 줬다는 엄마 말씀에 아무 말 못 했던 그 반지, 핏빛 붉은 커다란 루비반지, 그걸 도둑맞았다. 나를 줬으면 절대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나는 항상 집을 지키고 있으니 도둑맞을 일도 없을 테니. 그 소중한 엄마의 결혼반지, 그걸 잊어버리다니. 투명하게 빛나던 루비가 눈에 삼삼했다.
모든 보석은 사라지는 속성이 있다. 알게 모르게 사라지는 게 보석이다. 나 역시 다이아몬드 반지를 정원 손질하다 잃어버렸다. 언니도 도둑맞아 다이아몬드 반지를 잃었다. 언니와 나, 엄마까지 결혼반지를 잃었다. 반지로 사랑을 맹세한다는 것 자체가 미더운 일이 아니다. 보석도 사라지고 사랑도 사라지고, 사람 사이에 영원한 것은 없는 것.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엄마는 오래전 내가 선물한 거라며 장신구를 내놓았다. 이런 걸 내가 선물했었나, 기억조차 희미한 것들이다. 홍콩여행 길에 산 옥 목걸이, 큐빅을 삥 두른 왕방울만 한 모조 진주 반지, 그 옛날 백화점에서 산 검은 구슬 백은 인제 보니 샤넬 마크가 붙어있다. 당시에 나는 그 마크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값도 비싸지 않았으니 짝퉁인지 아닌지 지금도 모르겠다.
엄마는 말했다.
“내가 죽기 전에 다 정리한다. 이건 네 거니까 네가 도로 가져가라.”
하나도 값나가는 게 없었다. 그냥 버린다 해도 아깝지 않다. 그걸 엄마는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하찮은 몇 가지 해드리고 엄마의 소중한 결혼반지를 노렸다. 루비반지는 언니가 갖는 게 맞다. 언니는 엄마에게 장신구며 옷이며 핸드백이며 고급으로 해드렸다. 언니 것이니 언니가 잃어버린다 해도 상관없다. 아쉬운 마음이야 나만 가졌으려고. 물려주신 엄마도 언니도 다 상심했을 것을.
내게도 루비반지 비슷한 게 하나 있다. 백화점 액세서리 코너를 돌아보다 빨간 루비처럼 반짝이는 게 눈에 띄었다. 작은 알에 엄마 반지만큼 붉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괜찮아 보여서 샀다. 루비가 아니라 가네트라고 한다. 가끔 그 반지를 끼면 엄마의 루비반지 생각난다.
언젠가 넌지시 언니에게 한번 물었었다.
“언니, 엄마의 그 루비반지 말이야, 그거 지금 사려면 얼마나 할까?”
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거, 굉장히 비쌀 거야. 아마도 그런 원석 반지 없을걸.”
하나님의 보석, 성경 속 아론이 목에 걸었던 보석, 몸에 지니면 모든 악에서 보호해 준다는 보석, 루비. 결혼 40주년 기념석이라는데 엄마가 여태껏 지녔다면 70년 가까이 기념이 되었을 보석. 엄마의 루비반지는 내 마음 깊이 엄마의 초상으로 남아있다.
[2014년 4월]
--재미수필 제20집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