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은행나무

 

신순희

 

1 용문사의 은행나무지금도 잘 있을까. 역사 깊은 그 은행나무는 가을마다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아름드리 나무에 양 팔을 벌려 깍지 끼려면 몇 사람이 필요했다. 나무 그늘만큼 자리한 땅에 떨어진 수북한 은행잎은 푹신한 노란 융단을 밟는듯했다. 오랜 세월을 겪은 노련한 한 그루의 거목 밑에 작은 나비로 내려앉은 은행잎들. 밟으면 발이 푹푹 빠졌다. 모두들 열심히 사진기로 그 모습 담느라 바빴다. 노란 나비처럼 나풀거리던 내 젊은 날의 은행나무
  
용문사의 천연기념물. 신라의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 은행나무가 되었다는가 하면, 신라의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심었다는 전설의 나무. 인고의 세월 천 년이 넘은 은행나무는 나라의 변고가 있을 때마다 소리를 내고 울었다던가
  
스무 살 즈음에 등산에 빠진 적이 있다. 주말마다 어머니 눈치 보며 빨간 등산화를 신고 제법 무거운 등산가방을 매고 집을 나섰다. 서울에서 가까운 용문산은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무슨 산악회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이 모였다. 그때 청량리에서 아침 일찍 완행열차를 타고 두어 시간 가면 용문역에 도달했다. 지금 나는 그 가을에 가 본 용문산은 기억이 안나고 오는 길에 들렀던 용문사 은행나무만 생각난다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 그때도 들어가지 말라고 울타리를 쳤을 텐데, 사람들은 그 은행나무를 붙잡고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나무 밑에 떨어져 쌓여 있는 은행잎을 두 손 가득 담아 허공에 뿌리면 노란 나비떼가 팔랑거렸다. 모진 풍상 사람들에게 시달려 몸살을 앓을 만도 하건만 아직도 건재하다니 견디어주어 고맙다. 놀랍게도 지금도 은행이 열린다고 한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내 가슴 속에 한 장의 황금빛 사진으로 남아있다.

 

2 경복궁 돌담길의 은행나무, 지금도 그대로 있을까. 여학교 시절가로수로 줄지어 서 있던 은행나무 길을 걸었다. 연초록 어린잎이 가을이 되어 노랗게 변한 은행나무 길을 걸으면 사춘기 소녀들의 마음은 그대로 가을이 되었다. 부채꼴 곡선 중간이 V자로 갈라진 은행잎은 두툼한게 부드러운 촉감을 준다. 따뜻한 마음처럼.

 

은행열매는 또 어떤가. 왈가닥 친구는 등굣길에 은행열매를 따서 학교에 가지고 왔다. 수돗가에서 손으로 만지면 큰일난다며 발로 비벼 열매껍질을 벗겨냈다. 열매에서는 지독한 구린내가 났다. 품위 있게 서 있는 나무의 열매가 코를 막아 쥘 만큼 악취를 가지고 있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건 그거고 우리는 열심히 은행잎을 주워 책갈피에 끼웠다. 조심스레 은행잎에 연필로 깨알같이 시를 써서 친구와 주고받았다. 시멘트가 아닌 돌담 같은 감성이 살아 있던 소녀 시절의 은행나무.
  
경복궁 돌담길을 지나다, 바람이 불면 사방에서 노란나비가 소리없이 떨어졌다. 멋지다고 황홀해 할때 미화원 아저씨는 묵묵히 긴 빗자루를 들고 쓸고 또 쓸었다. 다 쓸어 모아 둔 무더기가 다시 바람으로 흩어지면 아저씨는 빗자루 만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좋아서 일부러 걸어서 집으로 갔다. 여학생들만 그런게 아니었다. 철학적으로 보이는 남학생들도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고개를 숙이며 지나갔다. 사색에 잠긴 듯한 폼을 잡으며나는 지금도 그 길에 은행나무가 여전히 서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3 시애틀에서 나는 아직 은행나무를 보지 못했다. 이상하게 노란나비도 못 보았다. 하얀나비도 보고 단풍나무는 실컷 보았지만. 저 빨간 단풍나무 사이로 노란 은행나무가 있다면 어울릴 텐데. 날씨 탓인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시애틀에서는 뿌리 내리기 어려운가. 어떤 이는 시애틀에도 은행나무가 있다던데.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릴 만큼 장수한다니 잘 자랄 것 같것만.

 

구할 수 있다면 집 뒤뜰에 심으면 좋겠다. 은행은 암수딴그루라니까 두 그루 심어야 은행이 열리겠네. 아니다. 열매까진 바라지 않겠다. 그저 한 그루 심어서 여름에는 한줌 그늘을 드리워주고, 가을에는 노란 잎만 보여주면 더 바랄게 없겠다. 그러면 나는 아직은 연약한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용문사 은행나무도 보았다, 경복궁 돌담 길에 은행나무도 보았다 하면 되겠다.
  
한국에는 은행나무가 흔하건만 타향살이 십여 년. 이 가을 불현듯 은행나무가 보고 싶어지는 건 어머니 때문인가. 어머니는 귀한 은행을 어쩌다 정월 보름에 다른 견과들과 함께 몇 알 내 놓으셨다. 매끈하고 얇지만 단단한 껍질을 이로 까면 연두색 알맹이가 갈색 속껍질에 싸여있다. 입에 넣으면 아삭거리는 생열매 맛이 쌉쌀하지만 씹을수록 질리지 않는 맛이 난다. 질리지 않는 맛, 은근한 맛, 어머니의 음식 맛이 그렇다. 어머니, 지금 고국에는 은행나무가 노란나비 되어 우수수 떨어지고 있나요?

 

[2013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