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을 보고 나서

 

신순희

 

탁자에 있는 꼽등이를 손가락으로 튕겨버리는 기택(송강호)은 반지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소독차의 연기를 흠뻑 들이마신다.

공짜로 소독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기택의 대사에 관객들은 하하, 웃지만 곧 얼굴이 일그러진다. 바퀴벌레가 아니다. 하수구나 지하 같은 음습한 곳을 좋아한다는 꼽등이.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 parasite’을 보려고 시애틀의 한 극장을 찾았다. 그동안 상영된 한국 영화가 예정보다 빨리 간판을 내리기에 혹시나 이 영화도 갑자기 종영된 건 아닌가 염려했지만, 다행히 아직도 상영 중이다. 내가 아는 한, 이곳에서 처음으로 한국 영화가 여러 극장에서 미국 영화들과 동등하게 상영 중이다.

한국 영화이니 한인들이 왔겠지, 하는 예상이 어긋났다. 평일 저녁인데 헐렁하게 꽉 찬 객석은 거의 다 백인들이다. 칸영화제 수상작으로 인정받은 영화라서인가, 볼 만하다는 소문이 났을까, 아니면 봉준호 감독의 인지도가 높아진 것일까? 한인 사회에 홍보가 덜 된 탓인지 오히려 한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부잣집에 잠입하는 가난한 가족이라는 것만 알고 보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의 자리를 탐내 침투한다는 이야기 발상이 기발하다. 영화의 처음 한 시간 정도는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면서 조금 지루했다. 중반을 지나면서 관객들은 정색하고 화면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영어 자막을 싫어하는 백인들이 어떻게 감정이입이 될까 하는 염려는 기우였다.

관객들은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 어이없어하면서도 빠져들어 가고 있다. 나름 부자라고 여기는 관객은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에게 부의 자리는 올라가지 못하는 나무, 넘볼 수 없는 한계이다. 꼭대기는 변함이 없고 밑에서 자기들끼리 경쟁하는 것. 언제까지나 부자의 지하에 숨어 사는 빈자의 자리이다.

일반적으로 부자가 갑질을 해대고 매번 당하는 건 빈자이지만 이 영화는 반대이다. 가난한 가족이 부자 가족을 철저히 속이고 부자를 순진하다고 비웃는다. 부잣집 안주인은 너무 쉽게 속고 마음이 연약하다. 결국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죽고 죽이는 세상인가. 상상을 초월하는 곳에도 사람은 살고 있다. 부자들은 모르는 이야기다. 같은 하늘 아래 내리는 빗물인데 다른 느낌. 부자와 빈자의 차이는 그런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옛날 일이 떠올랐다. 대학 다닐 때 누군가의 소개로 성북동 부잣집 아이를 가르친 적이 있다. 그 집은 긴 언덕을 힘겹게 올라가야 했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커다란 철문을 사이에 두고 그 집 운전사와 나는 대면했다. 그때 그 느낌이 바로 이 영화에 나온다. 걸어서 올라가기 버거운 비탈길 그리고 끝나고 다시 내려오는 내리막길. 영화는 끝날 듯하면서 이어지며 마지막까지 이야기한다. 축 처진 어깨로 돌아가는 기택의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별 생각 없이 영화 기생충을 본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각본도 직접 쓴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며 미국 시장을 염두에 두지않았나 싶다.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컵 스카우트와 인디언 복장이 등장하는가 하면 부자 가족은 종종 간단한 영어로 대화를 한다. 이것은 영어를 섞어 말하는 요즘 한국의 사회상이기도 하다. 특히 냄새에 민감한 미국인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공공도서관에 들어온 홈리스 사람들의 냄새가 연상된다. 그것은 지하철 냄새로 연결된다. 지하에 사는 사람들의 냄새, 가난의 냄새이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이 오르는데 관객들은 서둘러 나간다.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다. 돌아오는 내내 불편한 무엇이 머릿속을 맴돈다. 벌레만도 못한 인생, 막사는 인생, 계획 없이 산다. 그날 밤, 영화의 잔영이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나중에 DVD 나오면 다시 한번 봐야겠다.

예상은 빗나가기 일쑤이지만, 오스카를 수상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2019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