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에서

유숙자

알로에에 조그만 촉이 생겼다. 처음에는 새로 돋아나는 잎이려니 하고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물을 주려다 보니 가느다란 줄기 끝에 보일락말락 한 뭔가를 달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꽃이라 생각지 않았고 꽃을 피우는지조차 몰랐다. 차츰 꽃대가 촛대처럼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설렜다. 알로에의 꽃소식을 친구에게 전했다.

 

“왜 우리 집에서는 꽃을 피우지 않았지?”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라오.” 자못 엄숙한 목소리로 친구의 섭섭함에 대꾸했다.

 

친구네 마당에는 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기에 담장 밑 외진 곳의 알로에쯤은 관심 밖이었을 게다. 알로에를 한 개 심어 놓으면 식용이나 약으로 쓸모가 있다기에 얻어왔다. 하늘을 향해 팔을 쭉쭉 뻗으며 자라는 알로에. 열대성 식물이라 뜨거운 햇볕에 익숙하고 건조해도 잘 자랄 것 같은데 이따금 물을 주었더니 더 잘 자란다.

 

알로에가 꽃대를 올리고부터 눈길이 자주 창가로 향했다. 습관처럼 듣는 음악을 알로에도 들려주려 볼륨을 높였다. 2cm 정도의 갸름한 노란색 꽃봉오리가 주렁주렁 달렸다. 어떤 모양의 꽃을 피우려나 만개의 아름다움을 기대했는데 다문 꽃잎 사이로 꽃술만 삐죽 내밀 뿐, 밑에서부터 차츰 차츰 시들기 시작했다. 향기도 없고 꽃잎도 벙글지 않아 꽃이라 부르기조차 하찮았다. 꽃이 퇴색되면서 연한 갈색을 띠어 생성의 임무를 마쳤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꽃대만큼은 실하게 여물었다. 꽃잎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꽃대, 거기에는 눈물겨운 꽃물이 번져 있었다. 알로에는 진이 빠진 듯 두 계절이 지나도록 새잎을 만들지 못했다.

 

여학교 시절 교감 선생님께서 들려주셨던 일화가 생각난다. 정신 연령이 낮은 학생이 있었단다. 행동이 굼뜨고 착하기만 해 곧잘 급우들의 놀림감이 되고 괴롭힘을 당했던, 학급에서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언제 제 몫을 하려나-.’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천근이었다. 여름 방학이 되어도 아이는 쉬지 않고 학교에 갔다. 어머니께서 물으시면 “할 일이 있어서요.” 하며 빙그레 웃기만 했다. 부모님은 믿고 지켜보기로 했다.

 

2 학기로 접어든 어느 날, 아들은 자신의 그림이 국전에 입선했다고 부모님께 알렸다. 부모님은 너무 뜻밖의 소식이라 한달음에 미술관으로 달려갔다. 아들이 수채화 한 폭을 가리켰다. 다섯 명이 합작해서 그린 그림 맨 밑에 정말 아들의 이름이 선명하게 빛났다. 놀랍고 감격스러워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저 그림을 너도 함께 그렸단 말이냐?”.

“그림은 그리지 않았으나 완성될 때까지 물심부름했어요.”

아이는 이제껏 보아왔던 모습과는 달리 씩씩하고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아들아, 네가 아니었던들 어떻게 저 그림이 완성될 수 있었겠니, 너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일을 했구나.”

그의 부모는 비록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나 작은 일을 마다치 않고 한몫해 낸 아들과, 붓 한번 잡지 않았지만, 수고를 크게 인정해준 친구들이 고마웠다. 자신감은 주변의 배려와 본인의 성실한 노력 여하에 달렸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은 성장한다. 그 생이 어떤 빛깔, 어떤 열매를 맺든 충실히 자신의 임무를 다한다. 하루살이에서부터 일년초, 다년생 식물까지 살아있는 것들이 생을 마감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어떻게 살았는가는 주어진 여건과 노력에 따라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꽃으로서 화려함이나 독특한 향기는 없어도 튼실한 꽃대를 올린 알로에나 작고 미미한 일이지만 동참하여 보람을 안은 소년의 기쁨은 주어진 일에 충실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우리 삶의 작은 것에서 영혼을 살찌게 할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햇빛이 비치면 그가 만들어낸 그림자도 함께 봐 주고 가을의 열매 속에 숨겨진 여름 나무의 수고를 헤아렸으면 한다.

잘했던 것들에 겸손하고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해 나도 그 무엇 하나는 손에 담고 맑은 얼굴로 이 계절을 만나고 싶다.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