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만나고 싶은 사람
유숙자
LA Opera가 2014 가을 시즌에 Verdi의 La Traviata를 무대에 올린다. 이번 공연에서 테너인 플라시도 도밍고가 바리톤을 택했다. 수없이 많은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던 도밍고의 이번 배역은 알프레도 제르몽의 아버지 역인 조르주 제르몽이다. 라트라비아타 아리아 중에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심금을 울리는 제르몽의 아리아, '프로벤자 네 고향으로' (Di provenza ilmar, il suol) 를 도밍고의 음성으로 듣게 되었다.
9월 13일부터 28일까지 7차례 공연하는 라트라비아타는 지휘에 제임스 콘론(James Conlon), 비올레타 발레리에 니노 마사이체(Nino Machaidze), 알프레도 제르몽에 아르투로 샤콘 크루즈(Arturo Chacon-Cruz) 이다.
3막 오페라인 라트라비아타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파리 사교계의 꽃인 비올레타의 집에서 파티가 열린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흠모의 정을 품고 있던 시골 출신의 젊은 귀족 알프레도는 친구로부터 비올레타를 소개받고 사랑에 빠진다. 비올레타는 폐병을 앓고 있었고 향락에 젖어 살았기에 순수한 그의 요청을 받는 것에 주저한다. 알프레도의 끈질긴 구애로 둘은 파리 근교의 집을 빌려 조용하게 살고 있다. 비올레타는 경제력이 없는 알프레도 대신에 파리에 있는 재산을 조금씩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이를 알게 된 알프레도는 돈을 구하러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부친 조르주가 비올레타를 찾아온다. 그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헤어져 달라고 부탁한다. 비올레타는 자신의 진심 어린 사랑을 알아달라고 한다. 알프레도를 사랑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비올레타는 병이 깊어져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기에 희생을 결심하고 떠난다. 작별의 편지를 읽으며 알프레도는 돈 때문에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때 부친이 되돌아와서 유명한 아리아 '프로벤자 네 고향으로'를 부른다. 파리의 한 화려한 파티장에서 둘은 재회하고, 알프레도는 도박으로 딴 돈을 던지며 비올레타를 모욕한다. 제르몽이 나타나 아들의 무례함을 꾸짖고, 비올레타가 떠난 것은 너를 위해서라고 밝힌다. 비올레타는 병으로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죽어가면서 알프레도와 다시 만나고, 이들은 지난날의 아름다웠던 때를 그리워하지만, 결국 숨을 거둔다는 내용이다.
대표적인 아리아는 1막의 "축배의 노래"(Brindisi), "아!, 그대였던가"(Ah, fors e lui). 3막의 "지난날이여 안녕"(Addio del passato), 등 주옥같은 아리아가 많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출연한 라트라비아타를 처음 관람한 것은 1983년 2월, 런던 코벤트 가든에 있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였다. 이 오페라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만 329번 공연한 작품으로 플라시도 도밍고와 일리에나 코트루바스가 알프레도와 비올레타 역을 맡아 열연했다. 40대 초반이었던 도밍고는 인생의 절정기를 맞고 있는 성악가답게 외모와 성량과 연기의 3박자가 똑 떨어졌다. 오페라 가수로서 외적 조건인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외모가 무대를 꽉 차게 만들었고, 부드러우면서 박력 있는 가창력으로 청중을 매료시켰다.
오페라는 타고난 목소리와 연기도 중요하나 그것 못지않게 배역에 부합하는 외모와 일치할 때 얻어지는 효과가 크다. 귀공자 품격을 갖춘 도밍고와 온 힘을 다하여 열창하는 코트루바스. 그들의 뛰어난 연기는 관람객이 극 속으로 빨려들게 했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가에게서 풍겨오는 청중을 압도하는 힘, 그 오페라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느껴지는 영혼의 일치인 것이다.
플라시도 도밍고와 한 시대를 살며 그의 예술 세계를 누릴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예술적 감동이란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지. 격정을 누를 수 없어 나도 뭔가 표시하고 싶었으나, 꽃을 던지고 브라보를 외치며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물을 흘리며 손뼉을 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공연이 끝났으나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마음은 당장 무대 뒤로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I’m in love with you. 속삭이고 싶었다. 텅 빈 이 층 홀에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 후에도 그가 공연하는 오페라를 보고 있으면 그가 출연함으로써 작곡자가 의지하고자 했던 기대 이상의 효과로 연기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 바리톤으로 부르게 될 '프로반자 네 고향으로'는 2막의 아리아로, 부도덕한 아들의 행위가 여동생의 결혼을 막고 있다고 하소연하듯 설득하는 따뜻하고 정감있는 아리아다.
“너의 가슴 속 깊은 곳, 그곳에 간직한 우리의 고향 프로벤자의 그 들판과 바다를 네가 어찌 잊을 수 있더란 말이냐! 그 고향 산천에 작열하는 태양의 찬란한 빛을 너는 어찌 잊을 수 있더란 말이냐! 옛 고향의 그 시절 네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너는 잊지 않았겠지. 거기서 너는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음을, 거기라면 네게 평화가 다시 한 번 빛나리라는 것을-----”
18세에 데뷔하여 73세인 지금까지, 오페라를 공연할 때나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나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그가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 신의를 중히 여기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음악인뿐만 아니라 팬들 간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를 가리켜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예술인이라고 평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기인 되지 않았나 싶다. 그의 모습도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보여주고 있으나 음성만큼은 아직 중년의 열정 속에 머문 음악 혼을 지니고 있다.
라트라비아타는 1853년 3월 6일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공연하는 오페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48년 1월 16일 명동 시공관에서 초연했다. 제작, 번역, 알프레도 3개 분야를 이인선이 맡았고, 비올레타에 김자경, 마금희. 임원식이 지휘하는 고려교향악단의 연주로 5일 동안 전회 매진 공연이었다.
큰아들이 오페라 관람을 권했을 때 처음에는 거절했다. 라트라비아타를 과거에 10여 차례나 관람했고, 내가 소장하고 있는 도밍고의 DVD도 여러 개 있다. 더하여 누가 지불하든 입장권의 부담이 엄청났다. 아들이 다시 한 번 간곡하게 권했다. 앞으로 플라시도 도밍고의 오페라를 볼 기회가 얼마나 더 있겠느냐고, 거절하는 엄마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하는 말이다. 일주일 만에 티켓이 배달되었다. 아들의 배려가 고맙다.
이 가을에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 플라시도 도밍고.
그의 오페라가 언제나 아름다운 영혼의 울림을 가슴에 남기는 영광을 누리게 되기 바라는 마음이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