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는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국내외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정치인이었다.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카터 아닌 다른 인물이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것이다.
카터는 10년여나 지속된 전쟁으로 무수한 전사자와 부상자를 내고 국론을 크게 분열시켰던 ‘베트남 전쟁’ 후유증과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고도의 불신감을 불러일으켰던 ‘워터게이트 사건’ 덕분에, 미국 대통령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던 행운의 인물이다.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하야하자, 부통령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이 되어 잔여임기를 채우게 되었다.
포드 대통령은 경선 투표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 로날드 레이건 1,187 대 1,070으로 패배시켰다. 카터와 포드의 대결에서, 카터는 닉슨 전 대통령을 사면한 포드를 근소한 차이로 물리치고 39대 대통령이 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카터는 40,977,147 표를 획득했고, 포드는 39,422,671 표를 얻었다. 선거인단 표수는 카터 297, 포드 240이었다.
카터는 경험 없이 거대한 연방정부 기구를 이끄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신선한 이미지와 새로운 스타일 기대 덕분에 대통령에 당선된 카터 대통령의 허니문 시기는 너무 짧았다.
그가 임명한 예산실장 랜스가 스캔들로 사임하고, 에너지 정책 등에서 의회의 강력한 지지를 얻는 데 데 실패했다. 그는 국내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로 인해 고민해야 했다. 석유위기로 어려움에 직면한 그의 대체 에너지 정책은 ‘쓰리-마일 아일랜드’(Three Mile Island accident)원자로 사고로 타격을 받기도 했다.
카터가 정책 결정에서 시행착오들을 겪자, 국내외 비판론자들은 그의 경험부족과 우유부단을 지적하면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한 교육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일례로 선거 기간 공약했던 주한 미군철수를 추진하던 카터는 의회, 한・일 양국, 군부의 반대에 봉착하여 포기해야 했다.
그의 지나친 인권중시 정책은 대외적으로 적지 않은 저항과 비판에 직면했다. 구소련과 어렵게 체결한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Ⅱ)은 의회의 반대와 구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추진력을 잃고 말았다.
악몽과 같은 최악의 사태는 이란에서 1979년 11월 4일 발생한 미국 외교관 52인에 대한 인질 사태로, 미국의 무력용 구출작전은 참담한 8명의 구조요원들과 충돌한 구조기들을 잃는 재앙으로 끝났다. 인질극은 444일 만인 1981년 1월 20일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는 순간 막을 내렸다.
카터는 인권신장을 위해 외국정부들을 서슴없이 비판했다. 그는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나마 운하를 1999년 12월 31일까지 파나마에 반환하는 조약을 관철했다. 1979년 1월 1일 자로 중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특기할 사건은 1979년 9월 5일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이스라엘 베긴 총리, 그리고 카터 미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회담을 시작하여, 9월 17일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서명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다. 카터는 중재자로서 이집트-이스라엘 간의 평화조약 협상을 도와 성사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1980년 재선 도전에서 레이건에게 선거인단 득표 489: 49라는 참패를 당했다.
퇴임한 후 카터와 로잘린은 1984년부터는 해비타트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퇴임 후 카터는 인권 진작, 국제분쟁 중재, 개도국 선거 감시 등을 위해 분망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카터의 한국과의 인연은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월남의 패망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박정희 정권에게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운 카터의 출현은 악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터는 베트남 전쟁에서 교훈을 얻었다. 그는 미군의 또 다른 대규모 참전에 따른 부담과 인명피해를 피하려면,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했고 충분한 검토와 토론 없이 이를 관철하려 했다.
카터의 한반도 정책은 박정희 정권과 한국 국민에게 치명타가 될 수 있는 경솔하고 위험한 정책이었다. 이에 대해 주한 유엔군 사령관 베시 장군은 북한군 전력 재평가라는 간접적 방법으로 반대했고, 의회에서 한국은 ‘시장’이라고 증언했다. 그의 참모장 싱글럽 장군의 노골적 도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위협을 느낀 일본도 한국과 외교적 공조를 강화했다. 찰머스 존슨 교수는 카터가 중요한 미군철수 협상카드를 활용할 줄도 모른다고 비판했다.
1979년 6월 말 한국을 방문한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한반도 상황 설명에 몹시 불편하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었다. 결국 카터는 철군정책을 백지화 했고, 반소 강경 보수주의자 레이건 대통령은 오히려 주한미군 증강조치를 취했다.
카터의 1994년 6월 중순 평야방문은 조지아 출신 레이니 당시 주한 미 대사의 요청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카터의 평양방문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었다. 당시 카터의 방북은 노회한 김일성에게 한반도 핵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나쁜 일(mischief)’이라고 비판했다. 뿐 아니라 카터의 북한 방문은 이적행위(利敵行爲)라는 지적도 나왔다.
두 번째 카터의 방북은 2010년 1월에 이루어졌다. 카터의 방문은 1994년과 크게 달라진 상황에서 이루어 졌다. 그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했으며, 국력이 급성정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는 상황이 되었다. 국내적으로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되고 군부가 실세로 등장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카터는 김정일의 건강과 장악력을 확인할 수 없었으며, 공항으로 가는 길에 숙소로 되돌아가 외교부상이 읽어준 내용을 듣고 오는 수모를 당했다.
카터는 에너지가 미국 안보와 경제에 중요하다는 인식으로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를 신설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당의 정통적인 입장을 반영해 사용후핵연료의 상업적 재처리와 플루토늄 회수를 무기한 연장하는 등의 조치로 원자력 연구개발에 찬물을 끼얹었다. 더구나 쓰리마일섬 원전 후속조치에 의한 안전규제 강화로 원전의 가격경쟁력이 저하하기 시작했고 결국 원전건설이 중단되는 시발점에 있었던 대통령이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그 결과로 미국의 원자력 산업은 혹한기에 있다. 10년 전에 기후변화 대응과 중국 수출 등 원자력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미국 내에 4기의 원전건설이 시작됐지만 4기 모두가 어려움에 빠진 것을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원전산업 인프라가 사라졌고 건설 노하우도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설이 계속 지연돼 공사비가 불어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셰일가스 등으로 가스발전의 경쟁력은 더 올라갔는데 원전은 계획된 공기조차 맞추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이 문제를 직시한 트럼프 대통령은 원자력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도록 지시했고 ‘미국 원자력 경쟁력 회복’이란 보고서가 마련됐다. 보고서에서는 원자력 산업 육성이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국방적 요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안보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재정적 어려움이 해소될 때까지 정부가 전 방위적으로 규제 완화와 재정적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카터는 갔다. 지나친 인권을 내세우다가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안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