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받히고 개에 물리고
최숙희
빨간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던 중 뒤차가 내 차 후미를 받았다. 아직 임시 번호판인 새 차의 페인트가 벗겨지고 범퍼가 찌그러졌다. 화장을 고치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한눈을 팔다 사고를 냈을까. 내 잘못이 없으니 상대 보험으로 해결 되겠지만 짜증이 났다. 바로 옆 주유소로 차를 옮기고 보험증을 교환하자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쌩하고 달아나버렸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황당한 일을 당했다. 갑자기 가해자가 사라졌으니 어디다 호소해야 하나. 온몸의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멍해졌다. 그나마 짧은 순간에 내가 자동차 번호를 외운 것은 기적이다.
초보 운전인 아들아이가 부담 없으라고 내가 쓰던 차를 주고 새 차를 뽑았다. 차가 한 대 더 늘고 20대 아이가 추가되며 주소도 다운타운 LA라 보험료가 많이 올랐다. 저렴한 보험료를 찾다가 에이전트 없이 온라인으로 운영하는 G회사로 보험을 옮겼다. ‘한국어가 통하는 에이전트가 없어 불편하겠지만 사고가 나겠어?’하며 보험을 바꿨는데, 이런 일이 바로 생겼다.
새 차를 찌그러트린 것도 화나는 일인데 뺑소니까지 치다니 괘씸했다. 911으로 신고하니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California Highway Patrol)가 왔다. 학창시절 즐겨보던 미국 드라마 ‘기동 순찰대’의 멋진 오토바이와 유니폼이 생각난다. 상황설명을 하고 기억나는 대로 그녀의 인상착의와 차량번호를 주며 생애 처음 경찰리포트를 했다. 오래전 내가 노란불에서 억지로 좌회전을 하다가 CHP에게 걸렸을 때는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왔는데 역시 지은 죄가 없으니 여유가 생기나 보나.
내 보험사는 내가 알려준 차번호로 상대방과 상대방 보험사를 찾았다. 보험도 있으면서 왜 그랬을까. 약물운전인가. 내가 차번호를 외울 거란 생각은 못했겠지. 순간을 모면하려고 현장에서 도망쳐 Hit & Run 기록을 갖게 되었으니 어리석다.
얼마전 등산을 갔다가 목줄 없이 달려드는 개한테 물린 일이 있었다. 다행히 같이 산행한 분이 소독약이 있어서 응급처치를 받고 항생제를 얻어왔다. 불도그처럼 양볼이 늘어진 근육질의 개였는데 나는 그 후로 개만 보면 움츠러드는 트라우마가 생겼다. 순진하게 개주인의 전화번호만 받고 헤어진 것이 실수였다. 전화를 여러 차례 걸었지만 안 받았다. 광견병 주사 여부를 묻고 등산바지 찢어진 것과 파상풍주사 맞은 돈을 보상해 달라고 텍스트를 보냈지만, 무시당했다.
또 다른 의미의 뺑소니, 양심불량이다. 찾아보니 공공장소에서는 6피트를 넘지 않는 목줄을 꼭 해야 하는 법이 있다. 반려견을 키울 때는 그에 따르는 법을 지키고 타인의 안전을 위협하지 말아야 하겠다.
사람이나 개나 나를 얕보나 본데 좀 독해 보이는 스모키 메이크업이라도 해야 하려나.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9/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