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수영장 풍경
최 숙희
겨울비로 날씨가 쌀쌀하다. 저녁을 든든히 먹었어도 진한 커피와 달콤한 고구마 케이크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추운 날씨만큼 마음도 춥고 허전해져서 일까. 아이들이 돌아간 후 다시 단순한 일상이다. 설거지는 자기가 할 테니 얼른 운동가라는 남편에게 떠밀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스포츠센터에 왔다.
이런 날씨엔 자쿠지에 들어가 몸을 덥힌 후라야 수영장 찬 물에 들어갈 수 있다. 중국인 모녀와 나 이렇게 셋뿐이다. 평소 눈인사만 했는데 오늘은 새해 인사를 하며 말을 건넸다. 노모의 나이를 물으니 놀랍게도 87세란다. 한동안 못 보았다는 내게 엄마를 모시고 언니가 사는 독일에 다녀왔다고 했다.
건강한 신체에 비해 노모의 정신은 가끔 오락가락한다. 한 번은 수영복을 안 입고 알몸에 타월만 걸친 채 수영장에 들어온 것을 내 친구가 발견하고 얼른 샤워실로 데려다 준일이 있다. 그 후로는 딸이 손을 꼭 붙잡고 에스코트한다. 딸이 일하는 낮 시간에 노모는 러시아인이 운영하는 시니어센터를 다닌단다. 퇴근 후 저녁 마실 가듯 스포츠센터에 함께 와서 운동과 샤워를 하는 모습이 훈훈하다. 귀찮다거나 힘든 내색 없이 그저 엄마가 건강을 이만큼이라도 유지하니 감사할 뿐이라는 딸을 보면 역시 노후에 딸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 맞나보다. 나처럼 타국에 사는 딸은 없는 것과 같겠지만.
수영장에 들어가니 몇 달 전부터 하반신 마비 아내의 재활운동을 위해 수영장을 찾는 백인부부가 보인다. 처음 보았을 때 보다 한결 밝아진 아내의 얼굴이 반갑다. 관심과 사랑이 무표정한 환자를 웃게 만들었다. 남편은 아내를 간병하느라 저절로 상체가 발달한 근육남이 되었다. 휠체어에서 아내를 안아내려 Lift(장애인이 앉아서 풀장에 들어가는 것을 돕는 기구)에 앉혀 풀장으로 옮기고 물속에서 운동시키느라 생긴 근육이다. 운동이 끝나면 자쿠지로 아내를 옮기고 남편은 수영을 하러 간다. 먼저 와있던 사람들은 그녀에게 마사지하라며 월풀이 나오는 자리를 양보하고 말동무를 해주기도 한다. 한국, 중국, 일본의 아시안들과 남미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운동 후 하루의 피로를 풀기위해 자쿠지를 이용한다. 사용하는 언어는 달라도 진심으로 환자를 배려하는 훈훈한 풍경에 마음이 따스해진다.
며칠 전 여성 탈의실에서는 수영장에 매일 와서 아내를 운동시키는 ‘백인 남자’가 화제였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순애보 남편이라고 칭찬을 하다가 “만약 사고나 질병으로 마비가 온다면 내 남편도 그 남자처럼 극진히 간병할까“질문이 나왔다. 양로병원 간호사로 일하는 분은 경험으로 많이 보았다며 다 도망간다고 장담한다. 긴병에 장사 없다는 옛말이 맞는 것인가.
”저희 남편은 끝까지 간병해줄 거예요“애교 많은 Y가 말한다. 나는 자신 없다고 하니 ”평소에 남편에게 잘 하며 보험을 들어두셨어야죠“한다. 그렇잖아도 아내의 재활운동을 위해 풀장에 매일 오는 백인남자 칭찬을 남편에게 하며 당신은 어떨 것 같으냐는 내 물음에 즉답을 피하는 남편을 믿을 수 있을까. 적당한 운동과 올바른 섭생으로 건강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보험일 것이다. 내 건강은 내가 지키자. 물살을 가르는 손과 발에 속도가 붙는다.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9/01/25
어제 이 아침에서 읽었지라.
한국 남편들은 엄두도 못 낼 따뜻한 백인 남편들.
이제부터라도 서로서로 노년을 위한 보험을 잘 들어두어야 할 듯해요.
그러나... 그 보험이 한국 남편들한테도 유효하게 쓰일까 몰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