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9/12/26
30년차 부부의 대화법
뉴욕행 항공권을 급히 샀다. 딸이 감기몸살이 심하다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했기 때문이다. 날씨를 찾아보니 화씨 35도로 계속 흐리고 비까지 온다. 계절의 변화가 별로 없는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으니 겨울철 동부를 방문하려면 따뜻한 옷을 꼭 챙겨야 한다. 지난겨울 구입 후 몇 번 안 입은 두꺼운 바지를 꺼내 보고 후크가 고장 난 것을 알았다. 제법 비싸게 준 것이고 내가 고칠 수도 없어서 난감했다.
마침 연말이라 쇼핑할 것이 있어 쇼핑몰에 간 김에 옷가게로 가서 바지를 보여 주었다. 무료 수선서비스로 소매와 바지 길이를 줄여주고, 헤져서 생긴 구멍까지 꿰매준다니 반가웠다. 나는 후크대신 단춧구멍을 만들고 단추를 달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직원은 내 바지가 이미 단종된 상품이라 수선이 안 된다며 수선대신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지 묻는다. 나는 수선을 원하는데, 직원은 계속 수선 말고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지 물으니 답답했다. 서로 같은 말을 되풀이 하며 승강이가 오고 갔다.
혹시 바지에 감상적 가치(sentimental/emotional value)가 있어서 내가 그 바지를 꼭 소유하고 싶은지 직원이 물었을 때 비로소 새 바지로 교환해주려는 의도를 알아차렸다. 수선이 안 되므로 비슷한 디자인의 새 바지로 교환해주겠다는 제안이다. 가져간 바지는 리턴으로 처리되고 영수증 말미에 ‘품질 약속 교환(quality promise exchange)’이라고 쓰여 있다. ‘품질에 대한 약속’이란 말이 감동이다. 상품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넘친다. 어차피 수선 팀이 있다면 단춧구멍을 내고 단추를 달아 주는 것이 새 바지로 교환해 주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라는 내 생각을 관철하고 싶었지만, 새 바지를 준다는 데야 내가 양보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가 만족하지 못할 때 무조건 새 상품으로 교환해 주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는 마케팅 기법이려니 생각했다.
상황을 보고 있던 남편이 내가 직원과 대화할 때 남의 말은 안 듣고 자기 말만하는 평소의 버릇이 그대로 보인다고 지적한다. 평소 나한테 가졌던 서운함과 불만을 토로하나 보다. 내가 평소에 남편에게 느꼈던것을 그대로 말한다. 나도 남편에게 할 말은 많지만 입을 다물었다.
얼굴 표정만 봐도 기분을 알고 말이 별로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만 30년 차 우리 부부의 대화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은커녕 영혼 없이 건성으로 들으며 자기 말만 화살처럼 쏘아댄다. 서로 말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을 주지시키기 바쁘다. 어느 한사람이 양보를 안 하면 대화에서 논쟁, 싸움으로 발전하므로 싸우기 싫어 대화를 포기하기 일쑤이다.
앞으로 30년을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서로의 입장을 배려하며 진정한 대화를 나누며 살아가려면 어찌해야 할까. 새삼 새로운 대화법을 배우기라도 해야 하나. 30년 세월이 남기는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