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꿈꾸고 도전한다
최숙희
친구 B의 전화를 받았다. 주말에는 서로 전화를 피해왔기에 웬일인가 했다.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B의 목소리로 무슨 심각한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했다. 아틀란타에 사는 친구 S가 자다가 사망했다는 청천벽력의 소식이다. 심근경색으로 일주일간 보조 장치에 의존해 있다가 회생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판단으로 보조 장치 제거 후 숨을 거둔 것이다. 나보다 한 달 먼저 시민권을 해서 인터뷰 요령을 알려주는 그녀의 전화를 받은 것이 불과 두 달 전인데 이럴 수가 있나. 올해 고등학교 동기모임을 그녀가 사는 아틀란타에서 하기로 했는데 작별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100세 시대라는 요즘 60세도 되기 전에 가다니, 역시 아무도 장담 못하는 게 인생이다.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외면하며 살았다.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은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했다. 오늘 하루를 즐겁고 행복하게 ‘카르페 디엠’하며 살자고 마음먹었다. 무엇이든 훗날로 미루지 말고 즐기자며 산악회 연례행사인 맘모스 크로스컨트리 스키여행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운동신경이 젬병이지만 걸을 수만 있다면 스키를 탈 수 있다는 인터넷정보를 믿기로 했다. 한 시간 그룹레슨을 받고 실전에 들어갔다. 이론적으로는 알겠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특히 내리막에서 가속도가 붙을 때 속도를 줄이는 요령을 터득하기까지 몇 번이나 더 넘어져야 할까, 답이 안 나왔다.
여행지에서의 하루는 평소보다 일찍 시작된다. 아침잠이 많은 나도 음력설날 아침 떡만둣국 당번이라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분들은 새로 시작한 ‘사랑의 불시착’드라마를 틀어 놓고 모닝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창밖엔 눈 덮인 고산의 경치가 황홀하고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장작불을 바라볼 수 있으니 이것이 행복이고 힐링이구나 싶었다.
그때 K선배님이 연두색 네온빛깔 조끼를 입고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오셨다. 새벽부터 7.5마일 마라톤 연습을 다녀오는 길이란다. 4월에 있을 런던 마라톤을 위한 워밍업 연습이다. 77세 희수를 바라보는 연세지만 ‘나이는 진정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그분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최고령의 나이로 완등해서 기네스북에 등재되고 세계 8대륙 마라톤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전설 같은 분이라 막연히 특별한 체력을 타고난 분이려니 했다. 비밀은 부단한 연습의 결과였다. 그분의 수많은 도전과 성공이 거져 얻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았다. “내겐 아직 실패할 수 있는 꿈이 많이 남아 있다”고 그분의 자서전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그 연세에도 꿈을 꾸고 도전하며 꾸준한 연습으로 꿈을 실천하는 모습은 감동이다. 가르침을 주는 선배를 가까이 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아들이 친구 Rena Wang 집에 다녀온 소감을 얘기한다. 의대 준비를 하는 리나가 MCAT시험을 끝내고 대학교 친구들을 초대했단다. 그녀는 미국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했던 배드민턴 선수다. 벽면 가득 붙여둔 생활계획표가 인상적이었다나. 디지털이 익숙한 밀레니얼 세대인 그녀가 아날로그적인 생활계획표라니, 뜻밖이다. 아침에 기상해서 15분간 요가, 15분간 침대와 방 정리, 시험공부 등, 분 간격으로 상세하게 계획표를 짜두고 생활한단다. 계획대로 한 것과 하지 못한 것을 체크하여 일주일 단위, 한 달 단위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단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국가대표가 될 때까지 목표를 세우고 성취한 사람은 무언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었다. 주어진 시간을 너무나 당연히 생각하고 느슨하게 허투루 살았다고 생각하니 부끄럽다.
나는 그동안 ‘카르페 디엠’을 단순히 오늘을 즐기자는 의미로 오해하고 있었다. 오늘 주어진 하루를 충실히 살아낸 후에야 진정한 ‘카르페 디엠’을 실천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20/02/06